콘위성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 웨일즈와 잉글랜드의 경계를 넘으면 바로 체스터이다. 체스터는 체셔(Cheshire)의 디(Dee) 강변에 있는 성곽도시이다. 인구는 2011년 기준으로 11만8200명이다. 1541년부터 도시로 인정받았다. 기원 79년 로마제국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 제국의 제2군단은 고대 지도제작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켈트 코르노비(Celt Cornovii)라고 한 땅에 데바 빅트릭스(Deva Victrix)라는 이름의 요새를 세웠던 것이 체스터의 시작이다.
체스터의 요새는 요크(York)나 카를레온(Caerleon) 등지에 같은 시기에 세운 요새보다 규모면에서 20%정도 컸다. 즉 브리튼 속주의 수도로 삼을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새는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으로 통나무 목책에 잔디와 흙으로 보강한 옹벽이었고, 밖으로는 V자 모양의 해자가 있었다. 네 방향으로 문이 있었고, 그 가운데 동문이 가장 오랫동안 남았다.
체스터의 요새는 4세기 후반까지도 로마군단이 지켰으며, 로마군이 철수한 뒤에도 민간인들의 정착은 꾸준하게 늘었다. 616년 노섬브리아(Northumbria) 앵글로 색슨족은 체스터전투에서 웨일즈의 브리튼 켈트족 군대를 물리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구조를 확립했다.
지금 남아있는 체스터성은 1070년 휴 다브란체스(Hugh d’Avranches)가 세웠다. 아마도 초기 색슨족의 요새가 있던 장소에 지었을지도 모른다. 12세기 들어 목조탑이 돌탑으로 대체되었고, 13세기에는 외벽을 세웠다.
성곽의 복잡한 부분은 1788 년과 1813 년 사이에 지어졌다. 동문은 1768년 리차드 그로스베너(Richard Grosvenor) 백작의 지원으로 우아한 모양의 아치로 재건됐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동문에는 늘어난 교통량을 고려해 중앙에 넓은 아치형 통로를 뒀고, 양쪽으로는 보행자를 위한 작은 아치형 통로를 뒀다.
1897년 빅토리아여왕의 다이아몬드 희년을 기념하기 위한 시계탑을 동문 위에 세웠다. 4면에 각각 시계판을 붙인 시계탑은 둥근 아치형의 철탑 위에 세웠고, 그 위로는 풍향계를 올린 구리로 만든 오지 큐폴라를 덮었다.
동문의 시계탑 가까운데서 성벽 위로 올라서면 두어 사람이 편하게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통로가 넓다. 느낌이 꼭 두브로브니크의 성벽 위를 걷는 느낌이 든다. 성벽을 따라 한참을 걸었으면 싶었지만, 제한된 자유시간 때문에 멀리까지 갈 수는 없었다. 시계탑에서 체스터 대성당 쪽 방향으로 방향을 잡으면 대성당의 널따란 후원이 나오는데, 보기가 참 좋다.
성벽을 따라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어 밤에는 혹시 여우라도 나오는 것 아닐까 생각해봤다. 여우사냥하면 영국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다. 찰스 2세 때인 1660년부터 시작해서 3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귀족 스포츠다. 여우가 민가에 숨어들어 닭 등 가축을 잡아먹는 피해가 커지면서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사이 대대적으로 여우 잡이에 나선 것이 여우사냥의 시작이라고 한다.
고기나 가죽을 얻는 생업을 위한 사냥이 아니었기 때문에 즐기는 스포츠 형태로 발전했다. 말을 탄 수십 명의 사냥꾼이 수십 마리의 폭스 테리어종 사냥개를 몰아 여우를 찾아 나서는데, 실제로는 사냥개가 여우를 찾고 물어 죽이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간 2만5000마리 이상의 여우가 희생되는 현실 등을 고려해 동물단체를 중심으로 여우사냥을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하지만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2005년에 이르러서야 사냥개로 여우를 물어 죽이는 전통적인 방식을 금지하는 여우사냥 금지법이 통과됐다.
근대에 들어서는 여우가 광견병을 옮긴다고 해서 여우사냥을 당연시 하는 경향이 더해졌지만, 20년 전 광견병 백신을 미끼에 섞어 뿌려 여우가 먹도록 한 뒤로는 광견병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게 됐다. 그렇지만 1990년대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여우촌충이 유럽의 여우를 감염시키면서 다시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여우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여우사냥에 박차를 가했음에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여우가 줄어들지 않은 것은 여우가 점점 더 많은 새끼를 낳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시골에 살던 여우들이 도시로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1930년대 이미 여러 도시에서 여우가 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1㎢ 당 다섯 무리가 살 정도로 개체군이 많아졌다. 1970년대 들어 노르웨이 오슬로, 덴마크의 오르후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캐나다의 토론토, 일본의 삿포로 등의 도시에서도 여우가 발견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붉은여우의 아종인 한국여우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서식했지만 6.25 동란 이후 남획과 쥐잡기 운동의 여파로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1978년 지리산에서 잡힌 것을 끝으로 멸종된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소백산을 중심으로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체스터의 구시가지에는 11세기 무렵 세운 예배당이 있고, 도심에는 튜더왕조 시절 유행했던 튜더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 이어진다. 그래서 구시가지 도심에 들어서면 중세로 들어선 느낌이 든다.
구시가지의 현재 체스터성당이 있던 장소는 로마시대의 기독교 바실리카가 있던 장소일 수도 있다. 바실리카는 성 바오로와 성 베드로에게 헌정된 것이었다고 한다. 암흑기에는 10월 10일을 가톨릭 켈트족 성자이자 은둔자인 노르베리(Norbury)의 바록(Barloc)의 축일로 받들어졌다고 한다.
로마군단이 철수한 다음에 앵글로색슨족이 교회를 세웠는데, 907년에는 앵글로색슨족의 공주 성 워버그(St Werburgh)에게 헌정된 교회를 세우고 그녀의 유골을 모셨다. 체스터 대성당을 영국 내 다른 성당들과는 달리 현지에서 구한 붉은 사암으로 지었다.
1092년에는 체스터의 첫 번째 노먼백작 휴 루퍼스(Hugh Lupus)의 발원으로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지었다. 13세기 무렵에는 여성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후 16세기에 이르도록 수도원건물들이 회랑을 따라 지어졌으며 성당의 부속건물들도 속속 추가됐다.
이 수도원은 1540년 헨리8세가 수도원해산명령을 내릴 때까지 유지됐으며 많은 부분이 손상됐으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건물을 지어가다 보니 노르만양식으로부터 고딕 양식을 거쳐 현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1868~1876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체스터 대성당은 입장이 무료다. 수세기에 걸쳐 증축을 한 탓에 내부가 복잡하다.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본당에 들어서면 제단이 까마득하게 멀리 보인다. 남쪽 수랑으로 이동하면 다양한 제단을 비롯해 장식품, 성경내용을 묘사한 그림 등 다양한 소장품과 다양한 연대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볼 수 있다.
본당의 북쪽으로 나가면 회랑이 이어지고, 회랑에는 기묘한 조각 작품들이 전시돼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안뜰에도 현대의 조각품을 설치한 것을 보면 대성당이 보유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연대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콘위에서 체스터까지 오면서 오래된 유적들을 참 잘도 지켜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들 유적이 담고 있는 긴 세월의 흔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특히 웨일즈 지역으로 밀려난 브리튼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에 힘겨루기는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해진다.
웨일즈 지역을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히로구시의 ‘파묻힌 거인’과 연결해 생각해보는 이유이다. ‘파묻힌 거인’의 무대는 고대 잉글랜드이며 시대적 배경은 5~6세기경 브리튼족과 색슨족 사이에 벌어진 정복전쟁이 끝난 뒤이다. 하지만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굳이 잉글랜드의 역사와 연계해 이해하려 들 이유가 없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기억과 망각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모든 사람들의 과거 기억을 한 번에 통제할 수 있는 기전으로 ‘망각의 안개’를 이용했다. 안개가 많은 영국의 기후적 특성에 착안한 것 같다.
그러나 기억을 연구하는 이반 이스쿠이에르두는 ‘망각의 기술’에서 망각은 소거, 습관화, 변별학습 등으로 기억과정을 억제하는 것일 뿐으로 기억의 장기적인 폐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기억을 인위적으로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망각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을 찾아가는 길에 색슨족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색슨족 사람들은 토끼굴에 사는 브리튼족 사람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이유를 알고 있다.
케리그라는 이름의 암용이 내뿜는 입김이 안개처럼 땅을 뒤덮고 사람들의 기억을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아서왕이 마법사 멀린으로 하여금 암용의 입김으로 망각의 안개를 만들어내도록 한 것은 망각의 힘을 빌어 끝없는 전쟁을 마감하고 평화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재능을 줘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망각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면 그 기억들의 충돌로 오는 스트레스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파묻힌 거인'은 기억과 망각의 상보적 역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