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서른한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서른한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11-13 18:00:00

밀레니엄 브릿지를 지나면 색깔이 고운 블랙프라이어스 브릿지가 나타난다. 스코틀랜드 건축가 로버트 밀렌(Robert Mylne)이 이탈리아양식으로 설계한 303m길이의 이 다리는 런던 브릿지, 웨스터민스터 브릿지에 이어 템즈강에 놓인 세 번째 다리다. 포틀랜드에서 가져온 석재로 쌓은 9개의 반타원형 아치 위에 건설됐다.

9년의 공사 끝에 1769년 개통되면서 처음에는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장로의 이름을 따서 “윌리엄 피트 브리지 (William Pitt Bridge)”라고 불렀다. 뒷날 가까이에 있는 도미니크수도회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Blackfriars Monastery)의 이름을 따다 붙였다. 이 다리는 1833년에서 1840년 사이에 광범위한 수리를 할 정도로 문제가 드러났고 결국 1860년에 철거됐다. 

지금의 다리는 조셉 큐빗(Joseph Cubitt)이 5개의 단철아치로 설계해 건설한 길이 281m의 다리로 1869년 11월 6일 개통된 것이다. 교각의 상부에는 존 버니 필립(John Birnie Philip)이 돌을 깎아 만든 새들의 조각이 있다. 하류 쪽에는 바닷새를, 상류 쪽에는 민물에 사는 새를 각각 조각했다. 다리의 북쪽 끝에는 당시 새로 즉위해 이 다리 건설을 결정하고, 개통시킨 빅토리아여왕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다음이 워털루 브릿지(Waterloo bridge)다. 오래전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하던 명화극장을 통하여 여러 번 만난 영화 ‘애수(哀愁, Waterloo Bridge)’의 주요 무대였기 때문에 꼭 보고 싶었던 장소다. 안개가 자욱한 날 혹은 맑은 날 황혼 무렵에 다리 위를 걸으면서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해보고 싶었지만, 배를 타고 다리 밑을 지나는 것만도 감사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난 젊은 남녀가 사회적 통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엇갈린 운명의 덫에 걸려 슬픈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마이라(비비안 리)는 절망한 끝에 거리의 여자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 로이 대위(로버트 테일러)는 살아서 돌아오고, 워털루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한 그녀는 자괴감에 빠져 트럭이 오가는 워털루 브릿지의 찻길을 걷다가 죽음을 맞는다. 비비안 리의 청순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워털루 브릿지는 1810년 존 레니(John Rennie)의 설계로 건설을 시작해 1817년 유료다리로 개통됐다. 가까이에 스트랜드가가 있었기 때문에 개통 전까지는 스트랜드 브릿지(Strand Bridge)로 알려지다가, 개통 당시에는 1815년의 워털루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워털루 브릿지로 이름을 정했다. 

화강암으로 건설한 다리는 36.6m의 간격으로 세운 9개의 아치로 돼있다. 각각의 아치는 한 쌍의 도리아 양식의 석주를 난간 사이의 폭이 12.8m가 되도록 세웠다. 진입유도로 378m를 포함해 다리의 길이는 총 748.6m다. 

1840년대에 이 다리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 유명세를 탔다. 1844년 시인  토마스 후드(Thomas Hood)는 이 다리에서 한 창녀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한숨의 다리(The Bridge of Sighs)’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무모하고 무책임해 보이는 / 그녀의 저항을 / 깊이 파보려 하지 마오. / 모든 불명예는 사라지고 / 오직 아름다운 / 죽음만이 그녀에게 남았으니. // 자매의, 형제의, / 부모의 / 정(情)도 변했다네. /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진 / 무자비한 징표 같은 사랑이 / 신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 낯설어 보인다오.(Make no deep scrutiny / Into her mutiny / Rash and undutiful: / Past all dishonour, / Death has left on her / Only the beautiful // Sisterly, brotherly, / Fatherly, motherly / Feelings had changed: / Love, by harsh evidence, / Thrown from its eminence; /  Even God's providence / Seeming estranged.)” 

시인은 먼저 그녀의 평소 행적으로 쌓인 모든 죄는 그녀를 받아준 강물이 씻어주었으니, 그녀를 비난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조차 그녀를 외면했지만,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1884년 교각에서 발견된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 1925년에는 교량의 통행을 막고 상판을 일부 제거한 다음 철골 구조물을 임시로 설치했지만, 결국 1930년대 들어 다리를 철거하고 새로 건설하기로 했다. 

자일스 길버트 스콧(Giles Gilbert Scott)경이 설계한 새로운 다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준공이 늦어지다가 1942년에 공식적으로 개통됐다. 지금의 워털루 브릿지는 1942년에 개통된 다리다. 다리 남쪽으로는 국립극장을 비롯해 왕립 페스티벌 홀 등이 있다. 

워털루 브릿지 다음이 골든 쥬빌리 브릿지(Golden Jubilee Bridge)인데, 그 중간쯤의 북쪽 제방에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Cleopatra's Needle)이다. 같은 이름의 오벨리스크가 뉴욕과 파리에도 각각 있다. 이것들은 19세기에 각각 런던, 뉴욕, 파리에 옮겨진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이다. 

런던과 뉴욕의 것은 한 쌍이며, 파리에 있는 것은 룩소르의 다른 장소에 있던 다른 한 쌍에서 옮겨진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들은 이름과는 달리 프톨레마이오스왕국의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과는 관련이 없다. 런던과 뉴욕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18왕조의 파라오 투트모스3세(Thutmose III) 때, 파리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2세(Ramesses II) 때 만들어진 것이다.

런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은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붉은 색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약 21m 높이에 무게는 약 224톤에 달한다. 기원전 1453년에 투트모스3세의 전공(戰功)을 이집트 상형 문자로 새겨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시에 세웠던 것이다. 

1819년 이집트와 수단의 지배자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가 1798년의 나일전투를 승리로 이끈 넬슨경과 1801년의 알렉산드리아전투를 승리로 이끈 랄프 애버크롬(Ralph Abercromby)경의 공로를 인정해 영국정부에 선물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정부가 런던으로 옮기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 1877년까지 이집트에 방치됐었다.

유명한 해부학자이자 피부과 전문의 윌리엄 제임스 에라스무스 윌슨(William James Erasmus Wilson)이 운송비로 1만 파운드를 후원해 런던으로 이송하게 됐다. 오벨리스크는 존 딕슨(John Dixon)이 설계한 직경 28m, 직경 4.9m의 거대한 철제 실린더에 담겼다. 클레오파트라라고 명명한 실린더에는 수직으로 세운 기둥과 고물, 방향타, 2개의 용골(bilge keels), 돛의 균형을 잡을 돛대, 그리고 갑판까지 있었고 카터(Carter)선장이 조종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부스(Booth) 선장이 지휘하는 배, 올가(Olga)가 예인해 런던으로 향했다. 하지만 항해가 순조롭진 못했다. 1877년 10월 14일 스페인 북부의 비스케이만 이르렀을 때 강력한 폭풍을 만나 클레오파트라가 심하게 롤링하면서 통제 불능상태에 빠졌다. 올가호의 승무원 6명이 구조선을 타고 클레오파트라에 접근했지만, 배가 전복되면서 모두 사망했다.

부스선장은 올가호를 클레오파트라에 접근시켜 카터선장을 비롯한 5명의 승무원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유실되고 말았다. 다행히 4일 뒤에 스페인의 트롤어선이 클레오파트라를 발견했고, 글래스고의 기선 피츠모리스(Fitzmaurice)가 건져 올렸다. 

클레오파트라는 피츠모리스의 주인 페롤과 협상 끝에 2000파운드를 제공하고서야 1878년 1월 21일 템즈강 하구로 예인됐고, 1878년 9월 12일 오벨리스크를 빅토리아 제방에 세울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앞면에는 비스케이만에서 희생된 6명의 선원을 기리는 동판이 부착돼 있다. 

골든 쥬빌리 브릿지를 지나면 템즈강의 남쪽 강변에 런던의 또 다른 상징, 런던 아이(London Eye)가 있다. 1999년 12월 31일 공식적으로 개통한 런던 아이는 높이 135m에 바퀴의 직경이 120m에 달하는 대관람차다. 

개통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람차였지만, 2006년 중국의 난창(Nanchang)에 생긴 160m의 대관람차 ‘스타’, 2008년에 싱가포르에 생긴 165m의 대관람차 ‘플라이어’, 2014년 미국 라스베거스에 생긴 167.6m의 대관람차 ‘하이롤러’ 등에 순위가 밀리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대관람차이다. 

줄리아 바필드(Julia Barfield)와 데이비드 마크스(Marks) 부부가 설계한 런던 아이는 거대한 자전거바퀴 모양을 닮았다. 포마(Poma)가 설계한 계란모양의 여객 캡슐은 하나의 무게가 10톤에 달하고 25명이 탑승할 수 있다. 

모두 32개의 캡슐을 매단 바퀴는 강철와이어에 의해 A-철골로 지지되는 중심축에 연결된다. 중심축은 전기모터에 의하여 1초에 26㎝씩 이동하여 한 바퀴 도는데 30분이 걸린다. 승객들이 탑승하는 동안에 운행이 중단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런던 아이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얼 코트(Earls Court)에 있던 그레이트 휠(Great Wheel) 때문이다. 인도제국 전시회를 맞아 1895년에 개장한 그레이트 휠은 시카고 페리스 휠(Chicago Ferris Wheel)을 모방해 지은 94m 높이에 직정 82.3m의 대관람차였다. 40명이 탑승할 수 있는 캡슐을 단 그레이트 휠은 1907년 열린 오스트리아제국 전시회를 끝으로 철거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