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에서 배우 유아인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덕분에 배우 김혜수 원톱 영화, 혹은 김혜수-허준호가 주인공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많은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며 유아인의 연기를 기억할 가능성이 높다. 영화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는 그의 연기는 그만큼 인상적이다.
여러모로 ‘문제적’인 배우 유아인이 이번엔 감초 주연으로 돌아왔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경제 위기를 미리 감지한 후 사표를 던지고 투자자를 모으는 열정적인 금융맨 윤정학이다. 지난 21일 서울 팔판길 한 카페에서 만난 유아인은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출연 계기로 꼽았다.
“‘국가부도의 날’이 IMF 외환위기라는 현대 사회의 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는 이야기긴 해요. 하지만 어느 한 계층이 아닌 모든 국민들과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이 매력적이었죠. 저에겐 그 점이 가장 (의미가) 컸어요. 또 영화가 분노를 일으키는 것보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거죠. 그게 IMF를 주제로 한 최초의 영화 입장에서 현실적이고 무례하지 않은 방식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순간을 행복한 기억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보단 상처로 기억하는 국민들이 훨씬 많잖아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 충분히 예의 있게 접근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감독님과 제작진이 그에 관한 신뢰를 충분히 주셔서 함께 할 수 있었죠.”
영화 속 유아인의 연기는 자유롭다. 21년 전 실제 있었던 이야기 속에서 가상의 인물을 맡아 뛰어 놀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배우가 아닌 유아인이 해낼 수 있는 해석과 표현이 있었고 그걸 보여줬다. 유아인은 제작진의 요구에 맞춰 연기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건 사실 제 역할에 기대하는 제작진의 요구가 있었어요. 극의 흥미를 돋우고 인물에 재미를 부여하길 원하셨어요. 정의나 상처 같은 감정들보다는 인물 자체의 에너지로 관객들과 호흡하라는 요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적극 동의했고 그 부분을 효과적으로 살리고 싶었어요. 제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가 남들과 다르게 튀는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설명으로 전달하지 못해도 힘으로 관객을 끌어당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배우로서의 제 욕구도 중요하지만 제작진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편이에요. 작품마다 제 모습을 유연하게 가져가려는 의지도 있고요.”
대중들은 배우 유아인보다 SNS의 유아인, 논란 속의 유아인을 더 강렬하게 기억한다. 네티즌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으로 비판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아인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다. SNS도 앞으로 계속할 생각이다.
“전 삶을 의미 있고 재밌게 살고 싶어요. 그래서 모두가 하는 SNS를 제가 안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죠. 제 안에 있는 어설픈 정답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서 함께 정답을 찾아가고 싶어요. 그게 전달됐거나 제게 애정이 있는 분들에겐 위태로운 느낌을 드릴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결국 그런 순간순간들, 그리고 제 삶의 선택들, 직업적인 모습들이 모여서 제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만약 제가 세상과 등 돌리고 편하게만 사는 사람이었으면 작품에서 이런 연기를 보여드리지도 못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SNS는 제게 소통의 창구일 뿐이에요. 전 길거리나 사람들 많은 곳에도 잘 뛰어들어서 대화도 나누는 편이거든요. 전 단지 소통할 기회를 적극 활용하면서 나아가려는 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아인도 고민이 있다. 지금까지는 어떤 작품에 출연할지, 어떤 활동을 할지 확고했던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이전과 다른 활동을 해야 재미있을까 고민한다.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의 행동과 선택들이 미치게 될 영향, 그리고 그 이후를 고민하는 눈치다. TV쇼 출연도 그가 생각하는 대안 중 하나다.
“다양한 시나리오도 많이 들어오지만 TV쇼도 제안이 와요. 요즘은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해요. 지금까지 말한 제 고민들을 녹여내면서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고 기획 단계에 참여해서 얘기를 나누는 과정이죠. 사실 전에는 선택이 쉬웠어요. 제가 가야할 길이 명쾌했죠. 하지만 지금은 제가 창조적으로 선택해서 가야하는 시기라고 느껴요. 배우, 일종의 퍼포머로서 이전과 다르게 어떤 형태로 대중과 호흡해야 할지, 어떻게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요. 더 많이 보여드리고 더 높이 올라가고 앞장서서 가는 문제가 아닌 거죠. 지금은 그 선택들의 과정인 것 같아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UAA, 김재훈 포토그래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