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재영은 ‘잡학박사’였다. “인터뷰에서 농담을 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활자 매체의 위기와 영상 매체의 미래, 5세대 이동통신 발전에 관한 전망으로까지 이어졌다. 언젠가는 인터뷰를 실시간으로 시청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면서 정재영은 이렇게 확신했다. “이 인터뷰는 나중에 ‘성지’가 될 겁니다. 하하하.”
그가 잡다한 지식을 흡수한 건 다큐멘터리를 즐겨본 덕분이다. 재밌는 프로그램을 발견하는 것이 정재영만의 ‘소확행’이란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둔다. 좀비도 그 중 하나다. 좀비 열풍의 시초로 꼽히는 미국 AMC 드라마 ‘워킹데드’는 첫 시즌부터 챙겨봤다. 지난달 31일 서울 삼청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영은 “난 좀비 마니아”라면서 “좀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무조건 본다”고 말했다.
오는 13일 개봉하는 영화 ‘기묘한 가족’은 좀비를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다. 재난 영화의 성격을 띠던 그동안의 좀비물과는 다르다. 정재영은 영화에서 망한 주유소집 큰아들 준걸을 연기했다. 조용하던 준걸과 가족의 일상은 한 남성 좀비(정가람)를 만나 집으로 들이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준걸의 가족은 좀비를 이용해 돈방석에 앉는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에겐 일시적인 회춘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업은 곧 마을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온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좀비가 등장하면서부터 눈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좀비가 등장하는 코미디는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거든요. 그중에서도 신선한 발상이 있는 작품은 극히 드물고요. 국내에서 좀비를 코미디화한 건 ‘기묘한 가족’이 처음이에요. 그 신선함이 재밌겠다 싶었죠.”
정재영은 인간의 욕망이 좀비를 태어나게 했다고 봤다. ‘기묘한 가족’ 역시 무분별한 임상실험이 좀비를 만들어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정재영은 “무턱대고 ‘이런 게 있었다’고 설정한 뱀파이어나 귀신, 강시 이야기보단 좀비가 개연성 있지 않느냐”며 웃었다. 회춘하고 싶다며 줄지어 좀비에게 물리는 장면은 익살맞으면서도 풍자적이다. “인간의 욕망을 우습게 그린 점이 신선했다”고 그는 말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코미디가 가장 까다로워요. 유머는 취향을 많이 타잖아요. 세대에 따라서도 코드가 다르고. 많은 관객을 아우르려면 신경 써야할 게 많죠. 다만 연기를 하면서 ‘코미디니까 웃겨야지’라고 마음먹진 않습니다. 캐릭터에 맞게 표현할 뿐, 장르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진 않는 거죠.”
정재영은 “웃기려고 작정하면, 그 장면이 웃기지 않았을 때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사람들이 웃지 않으면 ‘나 원래 안 웃기려고 했어! 진지하게 (연기)한 거야’라고 도망갈 여지를 만들어 놓는 거죠. 흐흐.” 익살스러운 대답이었지만 그 사이로 ‘인물을 진실하게 보여준다’는 연기철학이 엿보였다. 동작을 과장한 슬랩스틱보다, 말맛을 살린 코미디에서 정재영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해보고 싶은 장르요? 의뢰 들어오는 걸 해야죠. 장르 가릴 땝니까, 제가. 하하하. 들어오는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 해야죠. ‘기묘한 가족’이 개봉한 뒤엔 드라마 ‘검법남녀2’를 찍어야 해요. 그 이후의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여행을 가볼까요? 제 꿈이 세계일주인데…, 못 갈 것 같아요. (일동 폭소) 20대 때부터의 꿈인데 아직 가본 데가 얼마 안 되거든요.”
수다쟁이 정재영은 영화 얘기를 끝낸 뒤에도 한참이나 농담을 늘어놨다. 문득 인터뷰 초반 ‘내 이야기는 잡담이 80%라서, 기사로 쓰려면 작문 실력이 중요하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계속 여행 이야기 중)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저는 이제 50년 남았잖아요. 이전 50년 동안에도 못 갔는데…. 그리고 여행도 젊었을 때 가야 재밌는 거지, 나중에 휠체어 타고 갈 건가? 그건 요양이지. 으하하하.”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