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 그가 맡았던 수많은 배역들은 그로 하여금 살아있는 듯 숨을 쉬었다. 그런 박정민도 ‘사바하’(감독 장재현)에서는 곤란을 겪었다. 최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라며 웃었다. 당혹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납득도 됐다. ‘사바하’는 그만큼 생소한 장르영화였기 때문이다. 흔히 배우들은 시나리오를 보며 영화가 완성되면 어떨지 그림을 그려보곤 한다. 그러나 박정민은 ‘사바하’를 보며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몰랐다고 회상했다.
“기본적으로 제가 ‘사바하’ 시나리오를 두고 그려본 그림이 별로 없었어요. 안 그린 게 아니라 못 그린 거예요. 저는 대부분 제가 임하는 시나리오를 보고 나면 감독님들의 전작을 반영해서 어떤 그림을 그려보는데, ‘사바하’는 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어요. 이런 장르가 처음이니까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상상도 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정말 신났어요. 제게 생소했던 그림들이 촬영에서 찰떡처럼 달라붙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들이 신기하더라고요. 감독님께도 도움을 많이 받았죠.”
박정민은 자신이 나온 영화를 볼 때 언제나 실망할 준비를 한다. ‘이번에는 또 내가 얼마나 연기를 못했을까’라며 겁을 낸단다. 일견 웃음도 나는 부분이지만 박정민은 진지하게 “‘사바하’는 달랐다”고 말했다.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관객의 입장이 되어 영화에 홀딱 빠져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의 힘이 굉장하다고 느꼈어요. 제가 글을 아는데도 그 내용에 빠져들어 보게 되는 거예요. 글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궁금함이 있었죠. 원래는 ‘사바하’ 촬영 전에 너무 많이 일해서 좀 쉬려고 했는데, ‘이 영화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연기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쨌든 배우로서 제가 어떤 장면을 연기할 때 ‘어떻게 하면 이 장면을 더 풍성하게 만들지?’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사바하’에서는 제가 기능을 수행하는 목적으로만 움직였어요. ‘나는 이 장면에서 어떤 역을 수행하는가? 이 장면의 목적은 무엇인가?’하는 마음으로만 움직였죠.”
표현력으로만 치면 박정민을 따라갈 배우도 충무로에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사바하’에서도 박정민에게는 수많은 나한이 있었지만 그는 굳이 다른 표현을 펼치지 않았다. 박정민 개인의 연기력을 보여주기보다는 장면의 목적에 따라서만 철저히 움직였다. 평소 감독이 1을 하라면 100을 해내서 그 중에 1을 고를 수 있게 하는 배우가 박정민이지만, 이번에는 철저히 1만 수행했다. 시나리오가 말하는 메시지에 뭔가를 굳이 더 더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장재현 감독에 대한 믿음 덕분이다.
“‘사바하’는 인물들이 가진 갈등과 고민들이 다 달라요. 관객들도 아마 자신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냐에 따라 다 다른 감상으로 영화를 보실 거예요. 저는 나한의 입장이기에 그의 감정으로 영화를 봤고, 쓸쓸하고 슬펐어요. 영화가 주는 메시지도 인물에 따라 다 다르죠.”
“스포일러 요소가 있기에 영화를 뭐라고 설명할 순 없어요. 복잡한 영화기도 하고요.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는 자신있게 ‘그냥 가서 봐.’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장르는 스릴러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추리물 같기도 하고요. 친구들이 빨리 가서 보고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비로소 ‘사바하’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사바하’는 오는 20일 개봉한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