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진, 매진, 매진, 또 매진.’
지난 17일 오전 10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감독 조 루소, 앤소니 루소)의 예매창이 열린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날. 그곳은 이미 ‘매진’이라는 빨간 글씨가 지배한 세상이었다. 좀비 드라마에서 발 빠른 생존자들이 이미 털고 간 마트를 뒤지는 기분으로 남은 시간대를 확인했다.
사실상 좋은 좌석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머릿속 불행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직업 특성상 포털사이트를 자주 들어가야 하는데, 난 정말 스포일러를 피할 자신이 있는 걸까. 먼저 본 사람들은 이제 나를 빼고 대화를 나누겠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가는 걸까. 패배자가 된 기분으로 뒤늦게 영화를 보고나면 내 감상을 들어줄 지인은 남아 있을까.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개봉 첫 날은 고사하고 첫 주말에도 영화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영화 마니아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용아맥’(용산 아이맥스관)은 꿈도 꾸지 않았다. 지금까지 개봉한 마블 영화 22편 중 21편(한 편은 ‘토르: 다크월드’)을 본 입장에서 맨 앞자리를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끝에 결단을 내렸다. “팀장님, 저 개봉 당일 오전 7시 첫 타임 영화 보고 기사 써도 될까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ㅇㅇ 알았어, 마블 오타쿠야.”
24일 오전 6시. ‘어벤져스: 엔드게임’ 예매 시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눈이 번쩍 떠졌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전날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재감상도 마쳤다. 결말을 알고 봐도 흥미로운 영화였지만, 다시 봐도 후속편이 어떻게 전개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1년 사이 개봉한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캡틴 마블’ 주인공들의 대활약이 예상되는 정도였다. 세 시간 조금 넘는 분량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믿을 뿐이었다.
평화로운 월드컵공원의 정적을 뚫고 사람들이 하나 둘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밖에서부터 ‘어벤져스’에 관한 대화들이 귀를 스치자, 제대로 찾아온 게 맞다는 실감이 들었다. 영화관에는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11번 번호표를 뽑아 대기 없이 예매표를 구했다. 평소와 달리 오전 6시에 출근했다는 아르바이트생의 업무용 미소에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매점 앞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관객들의 복장에 눈길이 갔다. 안경에 모자를 착용한 관객이 유독 많았다. 대부분 집에서 막 나온 듯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곧 출근할 것처럼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은 관객도 눈에 띄었다. 오전이어서인지, 혼자 온 관객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몇몇 관객의 대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상영관은 이미 관객들로 가득했다. 맨 앞 두 줄을 제외한 양 옆에 구석진 사이드 좌석까지 관객들이 자리를 채웠다. 혹시 늦잠 자느라 못 오는 것 아닐까 싶었던 빈자리도 금방 메워졌다. ‘대체 이 오타쿠 분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시다가 여기까지 오신 걸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 휴대전화를 만지며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마음을 가다듬는 관객도 보였다. 다른 영화의 예고편에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보단 ‘어벤져스’ 관련 이벤트 광고에 더 눈길을 주는 분위기였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관객들인 것이 분명했다.
서로에게 팝콘을 먹여주며 꽁냥거리는 커플 관객이 없는 점도 특이했다.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도 팝콘을 먹겠다는 일부 관객의 강한 의지에 감탄이 나왔다. 뒤늦게 입장해 좁은 통로를 지나가는 관객에게도 아무도 짜증내지 않고 조용히 길을 열어줬다. 흡사 어딘가에서 특별 지령을 받고 몰래 집회에 참석한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첫 만남 현장 같았다. 마블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성스러운 날 서로에게 함부로 짜증내지 말지어다.
마블 영화 특유의 만화책 넘어가는 오프닝이 등장하면 탄성이 터져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조용했다. 오전 7시부터 영화에 환호할 기운이 없는 것에 커다란 동질감이 느껴졌다. 또 오프닝 이전에 전 편의 쿠키영상 같은 잔잔한 장면이 먼저 나온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마치 한 세대를 풍미한 시리즈의 종결을 예고하듯 숙연하고 장엄한 분위기의 오프닝이었다. 앞으로 쏠려 있던 자세를 다시 바르게 고쳐 앉았다. 나태하고 경박한 자세로 볼 영화가 아니었다.
‘세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긴 길었다. 아침 공복과 과도한 집중으로 2시간이 지난 후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졸음이 쏟아졌지만 참아냈다. 주변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화장실 한 번 가는 관객이 없었다. ‘우리 모두 같이 참아보자’며 서로 기운을 북돋아주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전 마블 영화를 봐야만 알 수 있는 웃음 포인트마다 지체 없이 폭소가 터졌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우르르 줄지어 나가는 풍경은 볼 수 없었다. 쿠키영상이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기다린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정말 없네”라는 한 관객의 목소리에서 복잡한 심경이 읽혔다. 상영관 밖에서 영화 내용을 언급하며 떠드는 관객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극장을 빠져나온 후 영화 감상을 묻는 지인에게 뭐라고 답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먼저 봤다고 자랑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에필로그 같았다’고 적었다. 오프닝부터 예고된 것처럼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잔잔하고 묵직했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부터 지금까지 11년 동안 펼쳐온 모든 이야기를 하나씩 매듭짓는 영화였다. 누구도 불만을 갖기 어려운 흡족한 마무리였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24일 하루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개봉 일주일 전부터 성실하게 예매창을 뒤지고, 아침 일찍 간편한 차림으로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 덕분이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저 멀리서 첫 타임보다 더 좋은 컨디션의 새 관객들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