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었어요. 캐릭터를 만나서 탐험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이 어려웠고 그래서 더 재밌던 것 같아요. 끝까지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고 조마조마해하며 고민했죠.”
지난 8일 오전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문소리는 매 질문마다 인상을 쓰며 고민하고 시원하게 답변을 내놨다. 오는 15일 개봉을 앞둔 영화 ‘배심원들’(감독 홍승완)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했다. 깊게 고민하고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영화에서 문소리가 맡은 재판관 김준겸이 선고를 내리는 장면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부터 세트장 근처를 혼자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오랫동안 정교하게 준비하셨어요. 저를 계속 떠올리면서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배심원들’은 지난해 7월 크랭크인했는데 저는 그 전해부터 기다렸죠. 그때부터 제가 마지막 선고를 하는 장면에서 카리스마 있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전 멋있는 게 맞는지 마지막까지 고민했어요. 선고 장면을 맨 마지막에 찍었는데 그날 아침까지 고민을 했어요. 당시 추석 연휴라 차가 막힐 것 같아서 전날 밤 숙소에 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 혼자 세트장까지 한 시간 넘게 강가를 따라 걸어갔어요. 리허설을 하면서 제가 더 고개를 숙여야 될 것 같다고 감독님에게 말했어요. 준겸이 초심을 떠올리면서 참회하는 심정이 나타나야 될 것 같았거든요.”
선고 장면을 찍을 당시 문소리가 한 가지 요구한 것이 있다. 변호인과 검사, 배심원 등 법정에 사람들을 채워 달라는 것. 홀로 찍어도 되는 장면 같았지만 문소리의 생각은 달랐다. 판결문을 듣는 사람들과 현장에서 교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제가 긴 판결문을 읽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찍을 때 방청객들부터 법정의 모든 사람들을 채워달라고 감독님과 제작진에게 얘기했어요. 무리한 부탁이지만 마지막 선고를 모두와 교감하면서 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려면 보조 출연자들까지 아침 일찍부터 불러야 되고 세팅해야 해서 일이 커져요. 그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첫 테이크를 찍었는데 ‘컷’ 하자마자 다들 박수를 쳐주셨어요. 제가 멋있는 액션을 한 것도 아니고 이른 아침에 듣기 힘드셨을 텐데 조금이나마 감정이 전달된 것 같았어요. 클라이맥스의 감동에 좀 힘이 생길 수 있겠다 싶었죠. 그 순간 정말 뭉클했어요.”
문소리는 여러 방향으로 ‘배심원들’들을 준비했다. 실제 법정에 가서 국민참여재판을 지켜보기도 했고 많은 여성 판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김영란 전 대법관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문소리는 안심했다. 재판관들 역시 사람이고 정해진 틀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저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어요. 제가 법률용어부터 이런 경우, 저런 경우 어떻게 하는지, 원칙은 뭔지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재판관들도 달라요’라는 답이 돌아왔어요. 판사들이 각자 다 다르고 판사라고 해서 아주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죠. 실제로 판결문의 문체도 다 달랐어요. 어떤 분들은 은유적인 표현을 넣는 걸 좋아하는 분이 있고, 만연체로 쓰시는 분도 있고, 간결하고 쉽게 쓰시는 분도 있었죠. 각자 스타일이 다르구나, 내 스타일로 접근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문소리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 시간 대부분을 채웠다. 배우인 동시에 감독이자 교수이고 이젠 기획, 제작까지 생각한다고 했다. 이야기에 대한 관심과 재미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한국문학, 세계문학 전집을 읽으며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앞으로도 흥미로운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 책임감이 느껴지는 나이가 됐지만, 그보다는 제가 흥미롭고 재밌어하는 길을 가려고요. 전 어떤 지향점이 있어서 거기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과정이 중요하죠.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잖아요. 어디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좋은 동료들과 재밌게 일하고 흥미로운 것들을 탐험하는 과정에 뭔가 다른 것들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