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가요 음반에 애시드와 트립합이….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가수 김현철이 지난 1993년 낸 정규 3집 감상평에 담긴 댓글이다. 김현철의 대표곡 중 하나인 ‘달의 몰락’이 실린 음반이다. 김현철은 ‘시대를 앞서간 뮤지션’으로 통한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도 않은 새로운 장르에 먼저 발을 내디뎌서다.
최근 몇년 간 힙스터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시티팝’도 마찬가지다. 김현철이 지난 1989년 낸 정규 1집은 요즘 ‘한국 시티팝의 선두’로 주목받는다. 이 음반에 실린 ‘오랜만에’는 지난해 싱어송라이터 죠지의 목소리로 다시 불리기도 했다. 한국의 시티팝을 재조명하는 ‘디깅클럽서울’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김현철은 이 프로젝트로 죠지와 연을 맺어 한 무대에도 올랐다. 새 음반을 작업하면서도 죠지를 찾아가 “너, 나랑 노래 한 곡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지난 23일 발매된 새 미니음반 수록곡 ‘드라이브’(Drive)다.
신보 내기까지 13년…김현철에겐 무슨 일이?
“시티팝의 황제요? 어휴~ 아니에요.” 최근 서울 회나무로에서 만난 김현철은 ‘시티팝의 황제’라는 말에 손을 내저었다. ‘시티팝’이라는 단어도 2년 전에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조)동진 형님 추모 공연 날이었어요. 어떤 기자가 전화해 시티팝에 관해 묻더군요. 저는 시티팝이 뭐고, 누가 그런 음악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그게 내 음악을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대화를 잊을 때쯤 일본에 있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또 ‘시티팝’ 얘기였다. ‘형. 제가 아는 DJ가 형 음악에 관심이 많대요.’ 여러 상황이 맞물리면서 김현철은 마음이 동했다. 죠지와 공연을 마치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가을쯤에 음반을 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김현철은 지난 13년간 음악을 멀리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음악이 재미없어지더라고요.” 갖고 있던 악기와 컴퓨터도 팔았다가, 새 음반을 준비하면서 다시 사 모으기 시작했다. “‘반드시 내가 불러야 내 노래’라는 생각은 없어서” 음악 잘한다는 후배들을 불러모았다. 죠지, 쏠, 옥상달빛, 마마무 등이다. 김현철은 올가을 발매할 정규 10집 수록곡 가운데 다섯곡을 떼어내 ‘프리뷰’(PREVIEW)라는 제목을 붙여 미니음반 형태로 공개했다. 후에 공개될 노래에는 최백호, 새소년, 정인, 박정현, 박지윤, 박원, 오존 등이 참여한다. “백호 형이 노래를 진짜 잘 불러줬어요. 인생에 관한 노래인데, 모든 걸 달관한 목소리로….” 지난 작업을 떠올리던 김현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젠가 10집을 내야 한단 생각은 늘 했어요. 열 장의 음반을 캐비닛 한 칸에 넣고 싶었죠. 지금은 묵은 숙제를 해결한 느낌이랄까요. 다음 음악부턴 훨씬 자유로울 거 같아요. 싱글로 낸다든지 EP로 낸다든지, 아니면 또 정규로 가든지…. 10집만 내면 저는 날아갈 거 같아요.(웃음)”
“천재 프로듀서? 아직도 어색해요”
요즘 세대에겐 ‘복면가왕 아저씨’로 알려졌을지 몰라도, 김현철은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은 ‘천재 프로듀서’다. ‘춘천 가는 기차’가 실린 그의 정규 1집은 각종 매체에서 선정한 ‘한국 대중가요 100대 명반’의 단골손님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천재 프로듀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고 했다. “승철이 형이 예전에 ‘동아기획에서 나온 애(김현철)가 천재라며?’라고 한 말이 좋은 쪽으로 와전된 것”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가요계 선배로서 책임감은 느낀다. 자신의 음악이 후배 가수 혹은 뮤지션 지망생들에게 자주 불리고 연주된다는 걸 알고서부터다. ‘내가 음악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곡을 쓸 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단다.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겸임교수로 10년째 강단에 서고 있는 김현철은 재능 있는 후배들을 소개하는 유튜브 프로그램도 계획 중이다. 그는 “동료 교수들이 ‘진짜 잘하는 학생인데, 내보낼 데가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하지만 분명 알려지지 않은 가수에게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 유튜브 채널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재밌게 만든 1집, 그 순수함 찾으려 해”
김현철은 10집을 만들면서 “1집을 내는 기분”을 느꼈다. 홍익대 1학년 때 정규 1집을 냈던 김현철은 당시 “음악을 한다는 것에 마냥 감사해하면서” 음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1집이 명반으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서도 “순수하게 음악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2집부턴 ‘노림수’가 들어가요. 그러면 음악 자체가 변질하기 마련이죠. 이번 음반은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어요.”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는 그는 “데뷔하고 기다리다 보면 30년이 온다”고 농을 치면서도 “그래도 30주년은 ‘세대가 바뀌는 시간’이라는 의미는 있다”고 말했다. 김현철은 음악계가 ‘나선형 구조’를 따른다고 믿는다. 최근 부는 뉴트로 열풍처럼 예전 유행이 다시 돌아오는 듯 보여도, 입체적으로 보면 점진적으로 올라가고(발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1집 때의 순수함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김현철 그 자신도 나선형 구조 속의 한 사람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음악이 주는 의미가 커져요. 나는 음악이 내 삶 가운데서 아주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지금쯤 되니까 절반은 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음악을 해온 시간만 하더라도 인생의 절반 이상이니까요. 10년 만에 음악을 하니, 참 행복합니다. 1집 만들 때도 정말 재밌었거든요. 그때의 순수함을 되찾았냐고요? 회복은 안 돼요. 내가 회복하려고 하는 거지, ‘쟤가 다시 하얘졌구나’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순수함을 찾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제겐 상당한 일이라고 봐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