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복도식 아파트. 초인종을 눌러대는 소녀의 얼굴에 불안함이 스친다. 아무리 벨을 울리고 엄마를 불러대도 굳게 묻힌 문은 대답이 없다. 눈 깜짝할 새에 가족이 떠나기라도 한 걸까. 소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아파트 호수를 올려다본다. 아뿔싸. 집을 잘못 찾아왔다. 소녀의 집은 한 층 위인 10층. 집으로 돌아가자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엄마가 문을 열어준다. 전 세계 25개국 영화 시상식에서 상을 휩쓴 영화 ‘벌새’는 이렇게 시작한다.
“‘집’은 가장 편안한 공간을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잖아요. 저는 이 작품이, 집안에서조차 ‘집 같다’고 느끼지 못하는 은희(박지후)가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은 이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최근 서울 동작대로 아트나인에서 만난 그는 “‘벌새’는 은희가 자신 안에서 ‘집’을 발견하고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라면서 “그리고 그 사랑은, 남들로부터 받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벌새’는 김 감독이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시절 꾼 꿈에서 출발했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 정착하느라 “뿌리가 뽑혀 분갈이를 당하는” 기분을 느끼던 그는 중학생으로 돌아가는 꿈을 자주 꿨다고 한다. 그는 중학생 때의 기억을 글로 남겼고, 이것을 시나리오 형태로 옮겼다. 시나리오 집필은 이야기에서 ‘나’를 덜어내고 공동의 서사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김 감독은 “계산적이고 수학적인” 직조 과정을 통해 “영화적인 구조와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작품은 미성숙하고 복잡다단한 중학생 여자아이의 속내를 치밀하게 들여다본다. 김 감독은 “‘중학생 아이’는 주로 밝고 맑은 모습으로만 묘사되곤 했지만, 나는 은희가 때때로 서늘한 표정을 짓길 바랐다”고 했다. 은희가 “알 건 다 알고, 어른들의 마음속 소용돌이도 감지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서다. 카메라의 시선은 사려 깊되, 인물들의 감정에 개입하진 않는다. 김 감독이 인물과의 “건강한 거리 두기”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한 결과다.
“카메라 위치부터 배우들의 연기 방식, 대사까지 ‘정수’만 남기려고 했어요. 인생에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당시에는 아픈 줄 모르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가 그때 아팠구나’ 알게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은희도 그럴 것 같았어요. 현재를 살아가는 은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담담하게, 하지만 속에선 뭔가 타오르고 있다는 걸 무표정한 얼굴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게 더 큰 자장과 어떤 불편함, 또 어떤 애절함을 드러낼 것 같았거든요.”
‘벌새’의 상영 시간은 2시간18분으로 긴 편이다. 김 감독은 “가편집본은 더 길었다. 울면서 (이야기를) 잘랐다”며 웃었다. 생략한 장면 가운데는 은희가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와 정신적 유대를 나누는 장면 등이 있었다고 한다. “영지가 환상 속의 인물처럼 보여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아주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이나 본질이 통하는 관계를 현실에서 만나면, 그것이 기적 같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했거든요.” 은희에게 운동권의 투쟁가를 불러주거나 물기 어린 시선을 먼 곳에 던져두는 영지의 모습은 일견 꿈결 같지만, 김새벽의 아우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1994년 서울로 영지를 안착시킨다.
영지와 은희는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편지로 마음을 나눈다. 영지는 편지에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도 아름답다”고 적었다. 김 감독은 “실제로 삶이 신비롭다고 느꼈다”고 했다. 올 것 같지 않은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고통이 누군가의 사랑으로 위안을 받는다.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그 신비로움을 깨달은 순간부터 김 감독은 “삶이 더욱 생생해졌다”고 회고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쁜 일들이 항상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어떤 아픔은 나를 자라게 만들기도 하죠. 하나의 사건이 항상 좋다, 혹은 나쁘다로 귀결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일견 뼈아프고 나쁜 일들도, 훗날 어떤 식의 맥락으로 남을지 지금은 알 수 없다는 것도요. 그게 영지의 편지를 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편집하면서 (편지의 내용을) 몇백 번 들었는데, 심지어 제가 직접 쓴 편지인데도, 그 내용이 때때로 저를 위로해줍니다.”
김 감독의 세계관 안에서 은희도 자란다. 2011년 공개된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에서 은희는 초등학생이었고, ‘벌새’에선 중학교 2학년이 됐다. 시야가 넓어진 덕분에, 은희는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목도한다. 등굣길 재개발 지역에 붙은 철거민들의 현수막이 그렇다. 대치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은희에게 투영했다. “벌새 같은 어린 존재들의 투쟁, 포기하지 않는 투쟁”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은희는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 김 감독에게 속편 계획을 묻자 “원래는 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요즘 마음이 동한다”며 웃었다. 그는 “은희가 규정 너머의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며 “영지에게 그랬듯, 사람들의 이상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품 공개 이후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휩쓴 덕에 ‘벌새’는 “독립영화계의 ‘기생충’”이란 찬사를 얻었다. 하지만 제작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여성 감독이 만들고 여성 배우들이 주연인 작품.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실제로 김 감독은 언론 시사 이후 간담회에서 “투자를 받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여성영화가 많지 않은 환경에서, 여성이 영화를 하겠다는 꿈을 꾸는 건 정말 많은 지지와 도움, 자기 확신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가족과 친구, 함께 작업한 스태프들의 믿음에 깊이 고마워하는 김 감독을 보면서, 그가 말한 “본질이 통하는 관계”가 떠올랐다.
“여성 영화인들에게 ‘자기를 작게 두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제가 그랬거든요. 고백하건대 저는 ‘벌새’를 만들면서 제 안에도 ‘여성은 안 돼’라는 제한이 있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다음 작품을 만들 땐 저를 작게 두지 않고 싶다고 생각했고요.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죠. 커뮤니티도 굉장히 중요하고요. 무엇보다, 여성들이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