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탈리아 작가 A.단테가 쓴 장편 서사시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이 같은 문구가 적힌 문을 거쳐 단테가 목격하는 지옥은 총 9개. 그중에는 ‘분노의 지옥’도 있습니다. 노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죄를 지은 자들이 가는 곳. 시궁과 같은 강이 흐르는 이곳에서 죄인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허우적댑니다. 2019년 가을, 모두 화가 난 것만 같습니다. 작고 큰일, 평범하고 특이한 일에 우리는 너무 쉽게 분노합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작고 어렸던 여자 연예인도 스스로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많은 이의 노여움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예뻐서, 평범하지 않아서, 쉽게 돈 버는 것 같아서. 그를 향한 화살의 이유를 곱씹어보면 그저 하찮고 같잖기만 합니다. 그는 결국 떠났지만, 군중의 격노는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칼끝은 다시 그의 전 연인, 추모 글을 올리지 않은 연예인, 언론, 네티즌 가릴 것 없이 상대의 목을 노리며 뱅뱅 돌고 있습니다. 어디 이번일 뿐일까요. SNS에 올라온 누군가의 일상이 부러워서, 식당에 들어온 아이가 시끄럽게 울어서 등 너무나 사소한 이유로 상대를 헐뜯고 비난합니다.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의심과 좌절이 판을 칩니다. 절망이 만연한 이곳에 희망이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분노가 쌓이는 사회. 모두가 화난 이 상황이 어쩌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점점 타인의 결점을 용서하지 못하고 날것의 비난도 참을 생각이 없습니다. 질서정연해 보이는 아비규환이 있다면 현재의 우리 사회 같지 않을까요.
각자 짊어진 십자가가 유난히 무거운 요즘, 힘들겠지만 이제는 끌어안은 화를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낙망 앞에 선 사람의 손을 잡아 주지 못한 안타까움, 비겁함을 관망했던 자책을 분노의 감정으로만 치환할 필요는 없습니다. 혐오가 혐오를 낳듯이 분노 또한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벌어진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내일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신곡의 시구처럼, 분노를 내려놓을 의지가 없다면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 겁니다. 지옥의 시간은 끝나지 않을 테니 말이죠.
민수미 기자 mi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