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란 뭘까. 배우 김희원은 어느 새벽, 아파트 앞에서 한 여성을 붙잡고 그의 가방을 뒤지는 남성을 봤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그는 ‘똥개도 제집 앞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며 용기를 냈다. “야, 이 새끼야! 너 뭐 하는 거야!” 남자는 가방 뒤지기를 멈췄다. ‘기 싸움에선 선방했군’이라며 우쭐하려는데, 알고 보니 여성이 택시비를 내지 않아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단다. “그날 생각했어요. 용기는 뭐고, 두려움이란 뭘까. 평소엔 불량해 보이는 고등학생 무리도 피해 가는 저였는데….” 영화 ‘신의 한수: 귀수편’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희원이 들려준 얘기다.
그가 ‘신의 한수: 귀수편’에서 연기한 ‘똥 선생’은 용기와는 담을 쌓고 사는 인물이다. 내기 바둑의 세계에서도 그는 승부를 지켜만 볼뿐, 직접 나서서 싸우는 일은 없다. 덕분에 명줄은 길다. 김희원은 “똥 선생은 토끼나 사슴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조금만 아파도 아픈 티를 내는 토끼와 사슴처럼, 허당에 약골이지만 엄살이 많은 데다 도망에도 일가견이 있어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희원은 “인생은 얘(똥 선생)처럼 살아야 한다. 가늘고 길게”라며 웃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 똥 선생이에요. 감독님이 그러더군요. 바둑판이 인생이라면, 승리자는 똥 선생이라고. 똥 선생은 도박도 안 하고 싸움도 안 하지만, 결국 외제차를 몰고 사랑도 쟁취하죠. 허당에 약골, 싸움도 못하고 겁도 많지만, 도망엔 일가견이 있는 인물입니다. 원래, 모 나온 돌이 정 맞는다잖아요. 하하.”
시작부터 끝까지 비장한 영화 안에서 똥 선생은 유일하게 숨통을 트여주는 존재다. 뻔뻔한 듯 비굴한 모습이 웃음을 유발한다. 액션 영화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감초 캐릭터지만, 김희원은 빤한 인물로 보이지 않으려고 장면마다 고민했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고난(?)도 있었다. 주물공장에 인질로 잡혀간 똥 선생이 용광로 위에 매달려 귀수(권상우)와 외톨이(우도환)의 바둑 대결을 지켜보던 장면을 찍을 때였다. 김희원은 “배에 끈을 묶고 매달려 있으려니 죽겠더라”면서 “올해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김희원은 늦깎이 스타다. 영화 ‘아저씨’로 처음 주목받았을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무명 시절이 길었던 탓에 29세 땐 연기를 접고 호주로 떠나기도 했다. 김희원은 호주에서 벽에 페인트를 칠하며 돈을 벌었다. 한 번은 한국과의 문화교류 행사의 일환으로, 고국에 있던 후배 배우들이 와 공연을 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김희원이 그 공연장 바닥을 페인트칠하게 됐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년 6개월간의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김희원에게 물었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연기를 포기하려고 떠난 것이나, 다시 연기를 해야겠다며 돌아온 데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고. 그러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용기라고 부를 만한 일은 아니에요. 비겁하게 도망간 거고, 후회하며 돌아왔을 뿐이죠.” 하지만 이미 겪어본, 그래서 그 고통의 정도를 절감하는 어려움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건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김희원은 “호주에선 돈이 있어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가난과 배고픔은 여전히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래서 김희원은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으면 마음 놓고 쉬지를 못한다. ‘신의 한수: 귀수편’ 이후에도 영화 ‘담보’와 ‘입술은 안 돼요’의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김희원은 “다음 작품이 없어 큰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땐 감사한 마음을 되새긴다. 긍정적으로 살려는 노력도 그에겐 행복을 위한 여정이다.
“지금 행복하냐고요? 잘 모르겠어요. 경제적으론 행복하죠. 옛날엔 밥 사 먹을 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연극배우 시절엔, 누가 집에서 차를 한 대만 가져와도 ‘떠나자’하며 어디로든 갔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차도 있고 돈도 있는데, 못 가. ‘왜 못가지? 뭐가 날 잡고 있나? 지킬 게 많나?’ 싶어요. 좋은 배우가 되면 행복할 것 같은데, 아직 좋은 배우가 안 된 건지…. 나중에 (행복한가에 대한) 확신이 들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