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에 놓인 귤 세 알의 얼굴이 수줍다. 최근 서울 도산대로 안테나 사옥. 가수 루시드폴보다 먼저 기자들을 맞은 건, 이번에도 ‘귤’이었다. 루시드폴은 ‘농부 뮤지션’이다. 2014년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 귤 농사를 시작했다. “제가 웬만하면 귤 맛있다는 얘기를 안 하는데, 올해는 맛있네요.” 안테나 직원에게 귤을 청한 루시드폴이 느리게 말했다. 그는 레몬 수확도 앞뒀다. “지금은 덜 익은 ‘풋레몬’이 나고요. 제대로 익은 ‘햇레몬’이 나오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거, 꼭 ‘농민 인터뷰’ 같네요. 하하.”
제주의 하루는 도시보다 일찍 시작된다. 농번기에는 새벽 3시30분부터 기상해 해가 뜨기 전 밭일을 마쳐야 할 정도다. 오후 시간은 연구실에서 보낸다. ‘고요연구소’라고 이름 붙인 루시드폴만의 작업실이다. 그는 이곳에서, 제주 곳곳의 소리를 음악으로 탈바꿈시킨다. 기타 대신 컴퓨터 키보드를 잡고 앉아 소리를 매만진다. 16일 오후 6시 발매된 아홉 번째 정규음반 ‘너와 나’도 이렇게 탄생했다. “흔히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것들도 충분히 음악적일 수 있겠더라고요.” 루시드폴은 이 음반을 만들면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의 ‘작곡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서다.
반려견 ‘보현’은 ‘너와 나’의 주요 작곡가 겸 연주자다. 루시드폴은 보현이 일으키는 모든 소리를 채집·가공해 음악으로 만들었다. 보현이 콜라비 씹어 먹는 소리를 담은 ‘콜라비 콘체르토’나 보현이 산책을 가면서 내는 소리로 만든 ‘산책 갈까?’가 대표적인 예다. 루시드폴의 실험은 보현의 소리를 단순 삽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보현이 낸 소리의 파형을 추출해 여러 방식으로 변주해 ‘음악’의 형태에 가깝게 만들었다. “음반에 들어간 소리의 80%가 보현이 만든 거예요. 보현의 소리를 채집해 기록하는 것이, 마치 소리의 DNA를 뽑아 영원히 매체에 남겨놓는 일처럼 느껴졌죠.”
루시드폴은 어쩌다 보현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을까. 이야기는 작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그림책 ‘손으로 말해요’(글 조지 섀넌, 그림 유태은)를 번역하며, 번역료로 개 사료를 사 제주의 사설 유기견 보호소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의 속셈(?)을 알아챈 출판사 편집장은 ‘반려견 사진집을 내 인세를 보호소에 기부하자’고 제안했다. 루시드 폴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 반려견의 사진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책을 내면 음반은 언제 만들어야 하나’…. 결국 루시드 폴은 보현과 관계된 음반을 책과 함께 발매하기로 했다. ‘너와 나’ 프로젝트의 탄생기다.
음반엔 제주의 흙과 바람뿐 아니라 지구 저편 스웨덴의 새소리, 사람들 목소리, 호수와 바다 소리도 담겼다. 스웨덴 음악가 루드빅 심브렐리우스가 보내준 소리들이다. 루시드 폴은 이 소리를 ‘산책 갈까’ 후반부에 넣었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보현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스웨덴까지 이어지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루시드 폴은 보현에게 ‘목소리’도 줬다. 가수 정승환, 차이(CHAI), 미즈키(MiiZUki)가 각각 부른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 ‘두근두근’, ‘아이 윌 얼웨이즈 웨이트 포 유’(I'll always wait for you)가 그것이다. 루시드 폴은 “내가 쓴 곡인데도, 제3자의 목소리로 (보현의 노래를) 들으려니 마음이 찡해진다”고 했다.
루시드 폴은 강아지들을 위한 콘서트도 꿈꾼다. 그는 보현이 음악을 들을 줄 알고, 심지어 매우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개들은 개의 짖는 소리가 들리면 따라 짖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이번 음반은 들려줘도 짖지 않더라고요. 자기 소리인 걸 아나 봐요.” 한때 생명공학 연구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공대생’은 이제 ‘소리 연구가’가 돼 세상을 연주한다. 루시드 폴은 “보현이 매개가 돼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게 됐지만, 돌이켜보면 주변의 소리나 엠비언트 음악(전자 악기 중심의 공간감적 명상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소리와 음악의 경계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해요. 나무의 소리나 땅 속 미생물들의 소리도 인간의 도구를 통해 음악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물론 어떤 분들은 이 음반을 듣고 ‘내가 알던 루시드 폴과 너무 다른데? 이상한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제 길을 어떻게 가느냐에요. 더 재밌게, 더 오래 음악을 하기 위해선 제 음악을 넓히고 싶었어요. 제가 가진 팔레트 위의 색깔을 더욱 늘려가면서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