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 1조로 아주 잘 맞는 탁구를 친 느낌을 받았어요.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앙상블이라고 할까요.”
영화 ‘천문’(감독 허진호)이 시사회를 통해 첫 공개된 직후부터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이나 ‘명량’(감독 김한민)처럼 묵직한 느낌도 아니었고,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나 SBS ‘뿌리깊은 나무’처럼 세종의 업적에 집중한 느낌도 아니었다. 그나마 비슷한 영화를 꼽으라면 ‘사도’(감독 이준익)에 가까웠다. 조선실록의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세종과 장영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질문하고 상상력으로 답했다.
세종과 장영실을 연기한 배우 한석규와 최민식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건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절친한 두 사람의 연기 스타일은 정반대에 가깝다. 최민식은 나름대로의 완급 조절을 해가며 자유로우면서도 불같은 장영실을 표현했고, 한석규는 특유의 느긋한 호흡으로 고뇌에 빠진 세종을 연기했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최민식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길게 꺼낸 얘기는 ‘관계’였다. 그는 ‘천문’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에는 촬영 전 시나리오 회의 때부터 촬영이 끝나는 순간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 흔적이 담겼다. 최민식은 “‘천문’을 통해 어떤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가가 중요했다”고 말했다.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가 궁금했던 것이 출발점이었어요. 장영실의 출몰 과정은 기록도 없는 미스터리예요. 아무리 찾아봐도 생사가 없어요. 세종이 타던 안여(安與, 수레)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장영실이 곤장 80대를 맞았다는 기록이 팁이 됐다고 할까요. 장영실은 내관과 더불어 세종의 지근거리에서 생활했다고 해요. 아시다시피 임금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잖아요. 그만큼 아꼈다는 말이 되죠. 천문 사업을 비롯해 세종과 많은 얘기를 나눴겠죠. 근무시간을 따지지 않고 격의 없이 아무 때나요. 궁금한 것이 있거나 아이디어 떠올렸을 때마다 의논했다는 방증이 될 수 있어요.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왕과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과 만나서 어마 무시한 업적을 이뤄냈단 말이죠. 전 그게 굉장히 영화적인 설정으로 와 닿았어요. 장영실 입장에서 세종은 정말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요. 그러면 아마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200~300%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요. 더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았을까요.”
26일 개봉하는 ‘천문’을 볼 관객들이 놀랄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천문’은 단순히 세종과 장영실 사이에 존재했을 군신 관계 이상의 우정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브로맨스(Bromance)를 넘어 로맨스 단계까지 아슬아슬하게 나아간다. 두 사람이 보내는 눈빛과 표정, 대사를 듣다보면 정말 저 둘을 왕과 신하의 관계로 보는 게 맞는지 강한 의심이 든다. 최민식은 시사회 직후 장영실 역할을 연기한 소감을 묻자 “이렇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었다.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었다”는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 자유로웠으면 하는 느낌”, “둘의 관계의 진폭이 더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전 사극을 좋아해요. 굉장히 드라마틱하잖아요. 현실과는 다른 듯 하면서 닮아 있을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점이 재밌게 느껴져요.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 출정하실 때 갑옷을 벗으셨는데 왜 벗었냐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해요. ‘천문’에선 두 사람의 생활이 궁금했어요. 도대체 두 사람이 방에 틀어박혀 앉아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 얘기만 했을까요. 그건 아닐 거란 말이죠. 요즘으로 하면 ‘담배 하나 피고 해보자, 10분간 휴식’ 같은 느낌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결국 궁궐 내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두 사람의 시간과 관계가 누적됐다면 더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원래 시나리오는 조금 담담했어요. 철저히 왕으로서의 말과 신하로서의 말이었죠. 저희가 그런 걸 뭉개자고 했어요. 격식은 차리되 더 친한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뉘앙스를 내자고 했죠.”
최민식은 한석규와의 연기 호흡을 탁구와 음악에 비유했다. 촬영을 시작하면 연습한 것과 달리 서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사와 호흡을 받아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잘 짜인 곡을 만들기 위해 멜로디와 박자를 조절하는 데 신경을 쓰기도 했다. 최민식은 인터뷰 내내 한석규를 ‘석규’라고 부르며 대학교 1학년 때부터의 인연을 자랑했다.
“제가 한 학번 선배였는데 석규가 대학교 1학년일 때부터 제일 친했어요. 석규의 동기하고도 다 친했지만 유독 석규하고 그렇게 친했던 것 같아요. 제가 자취할 때도 놀러 와서 자고 간적도 있고 같이 라면도 끓여먹었어요. 영화나 연극도 같이 보러 다니고요. 석규가 노래를 참 잘했어요. 목소리가 좋잖아요. 동기들하고 그룹을 결성해서 강변가요제에 나가 상도 타고 그랬어요. 제가 영화 ‘올드보이’를 할 때 박찬욱 감독에게 석규를 추천하기도 했어요. ‘쉬리’ 이후에 오랜만에 둘의 호흡을 보여주고 싶었죠. 어떻게 하다가 그 기회가 무산됐지만 유지태 만큼 석규가 하는 우진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최민식은 관객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천문’을 보라는 바람을 전했다. 영화는 국제, 정치, 과학, 신분 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렇게 무겁지 않은 톤으로 진행된다. 배우 임원희, 윤제문, 김원해가 만들어내는 코믹한 장면도 꾸준하게 나온다.
“전 관객분들이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 듣는 것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에 가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극과 뭐가 좀 다른가’ 하셔도 좋고 ‘저 두 친구를 보니 ’서울의 달‘ 생각도 나고 얼마나 나이 먹었나 보자’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가볍게 가셔서 보시면 좋겠어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