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년 살기를 시작한 때가 한여름이었다. 한낮의 더위야 그늘이든 집안이든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높은 습도는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3층에 있는 주방의 개수대 마개를 밤새 들썩이던 비바람은 그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터라 무섭기까지 했다.
여름을 나며 많이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가 마땅한 과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과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값이 꽤 비쌌기 때문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며 특히 감귤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초기에는 시장에서든 농협의 마트에서든 가격 때문에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제주의 높은 물가를 맨 먼저 주유소에서, 그 다음엔 식당에서 그리고 과일값에서 실감했다.
겨울의 문턱에서 우연히 알게 된 신품종 귤, 황금향과 홍미향을 접하고서는 새로운 귤 맛에 푹 빠져서 겨울을 나고 있다. 함덕의 재래시장 근처에서 10kg 귤 한 상자에 1만 원 가까운 가격에 팔리고 있어도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보다 세 배 이상의 값을 기꺼이 지불하고 가져온 저 황금향과 홍미향이 귤 맛에 대한 내 눈높이를 한껏 높여놓았기 때문이다. 11월과 12월은 이 두 가지 신품종 귤과 함께 지나갔다.
수액 줄, 소변 줄, 비위관 줄, 뇌의 배액관 등이 어머니의 몸에 삽입되어 있었다.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13년간의 침상 생활을 시작했다. 늦은 시간에 집에 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나와 사무실 소파에 누웠다. 편히 이부자리 위에 누울 수 없었기도 했지만, 아침 일찍 중환자실에 들어가 밤 사이의 경과를 듣고 일과를 시작할 요량이었다.
뒤척이다 여섯 시에 일어나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내려가 중환자실 문을 빼꼼히 열었는데 들어설 수 없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이 보였다. 그중 눈을 마주친 간호사가 ‘들어오면 안 됩니다’하는 말 한마디를 듣고는 다시 닫았다. 차마 ‘저 비서실장인데요’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오전 면회시간에 깨끗이 빨아 적신 수건을 가지고 들어섰다. 어머닌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고 표정도 없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손을 닦는데 눈물이 났다. 소처럼 일하던 어머니였는데 지금은 솜털처럼 여리고 가벼웠다. 표정 없는 얼굴이 그렇게 편안하게 보일 수 없었다. 감당하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더 버티지 못하고 내려놓았을 때의 표정이 이럴까 싶었다. 담당 간호사가 다가와 어머니 상태를 설명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의식은 없고 결과는 더 지켜보아야 알 수 있다는 말이 너무 막연했다.
사라봉은 제주 시내 동쪽에서 제주항을 굽어보고 있는 오름이다. 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어 사라봉과 별도봉을 잇는 산책길은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때로는 울창한 숲속을 지나고 때로는 바다와 제주항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즐겁기만 하다. 두어 시간쯤은 땀을 흘리며 이 길을 걸었다.
사라봉공원에서 조선의 여걸 중 한 사람인 김만덕을 만났다. 김만덕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기억은 KBS에서 2010년에 방송한 드라마 ‘거상 김만덕’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장사 수완이 좋아 많은 재산을 모았고 흉년이 들었을 때 많은 사람을 구제한 여성’이라는 정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제주에서 만난 김만덕의 무게는 사뭇 달랐다. 사라봉 공원엔 김만덕을 추모하는 사당이 있고 20여 미터 높이의 ‘김만덕 추모탑’이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3 km 떨어진 제주항 입구엔 ‘김만덕 객주’가 복원되어 있고 근처엔 150여억 원을 들여 건립한 ‘김만덕기념관’이 있다. ‘김만덕기념사업회’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해마다 ‘의인 김만덕상’ 수상자를 선발해 시상하고 있다. 제주도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하나일 듯하다.
김만덕은 1739년 (영조 15년)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사별하고 외삼촌 집에 의탁해 살게 되었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월중선(月中仙)이라는 기생에게 보내져 몸종으로 지내다가 기생이 되었다. 20대 초에 제주도를 대표하는 기생으로 떠오르고는 ‘본래 양인이었으나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 기적에서 삭제해 달라’고 탄원한 끝에 23살이 되던 해에 다시 양인이 되었다.
이후 객주를 열고 장사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했다. 당시 객주는 상인들의 물건을 대신 팔아 주거나 상인 간의 거래를 도와 돈을 벌었다. 직접 장사에도 뛰어들어 제주의 특산물이었던 전복, 말총갓, 목재, 녹용과 같은 약재 등을 육지로 내다 팔고, 육지에서는 곡식과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을 사들여 제주에 팔았다. 50대에 이르러서는 제주도에서도 손꼽히는 대상인이 되어 많은 재산을 모았다.
김만덕의 나이 56세였던 1794년 (정조 18년)에 태풍의 영향으로 제주도에 대기근이 들었다. 당시 제주 목사는 다급히 2만석의 구휼미를 중앙에 요청한 상태였다. 구휼미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게 되자 김만덕은 자기 재산으로 500석의 곡식을 육지로부터 사들여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인 1,0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당시의 제주 목사가 이를 궁에 보고하고 이를 계기로 ‘육지에 나가 궁과 금강산을 보고 싶다’는 김만덕의 청이 받아들여 졌다. 당시 제주 여자들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이어서 정조는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직책을 주어 김만덕을 한양으로 오게 했다. 한양에서는 당시 좌의정이던 윤시동(尹蓍東)의 부인 처소에 머물며, 궁궐에 들어가 ‘한중록’을 지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알현했다. 그리고 금강산까지 유람하는 등 6개월을 지내고 제주로 돌아갔다. 김만덕에 관한 기록은 ‘정조실록’과 채제공(蔡濟恭)의 ‘번암집(樊巖集)’에 있는 ‘김만덕전(金萬德傳)’이 대표적이다.
김만덕은 당시 조선의 양반사회에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 중의 한 명이었다. 훌륭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었으나 김만덕은 재산보다 사람들의 목숨을 더 중히 여겼던 행동 하나로 당시 제주 여성의 굴레를 훌훌 벗어버렸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제주에서 가장 추앙받는 기업인의 표상이 되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