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역사 영화인 동시에 잘 만든 정치 영화이고, 잘 만든 장르 영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30년 전 발표된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41년 전 벌어진 정치 사건을 충실히 재현했다. 그렇다고 가장 중요한 근현대사 사건 중 하나를 그대로 재현해 역사 수업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다. 사건과의 적절한 거리감과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영화는 현실과 충돌을 반복한다. 영화에서 현실이 보이고, 다시 현실은 영화로 되돌아간다.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벌어진 중앙정보부장의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슬쩍 보여준다. 이후 40일 전 미국 워싱턴으로 돌아가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이 방아쇠를 당기게 된 사연을 훑는다.
김규평의 동료였던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은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이성민) 정권의 실체와 비리를 고발한다.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으며 일을 수행하던 김규평은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하나씩 펼쳐지는 걸 목격한다.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사사건건 반대 의견을 덧붙이는 김규평 대신 과격한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에게 힘을 실어준다. 미국에게 버림받고, 국민을 버리면서 돈을 챙기는 박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김규평은 결국 결단을 내리게 된다.
‘남산의 부장들’은 첫 장면에서 결말을 먼저 보여주고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플래시 백(Flash Back) 기법을 사용한다. 관객들의 시선을 뺏고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목적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용된 플래시 백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남산의 부장들’의 결말인 대통령 암살 사건은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관객 대부분이 알고 있는 결말을 첫 장면부터 보여주는 건 결말보다 과정, 행동보다 이유에 집중하겠다는 일종의 메시지이자 선언이다.
결말이 정해진 닫힌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건 사건이 아닌 인물이다. 영화 속 김규평의 말과 행동은 정해진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입장과 생각, 행동의 의미는 다르다. 영화는 그가 암살을 저지른 이유를 명확히 특정하기 어렵게 그린다. 그는 40일 동안 직업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생각하고, 개인적인 분노와 권력 욕심을 보여준다. 이유가 많지만 한 가지를 내세우거나 엮진 않는다. 그의 행동이 어느 정도 계획적이었는지, 아니면 돌발행동이었는지도 모호하다. 그의 행동이 혁명과 내란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어느 장면의 김규평은 혁명적인 영웅처럼 보이고, 다른 장면에선 치졸하고 인간적인 소인배처럼 보인다.
‘남산의 부장들’은 실제 인물들의 외모와 말투까지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이름은 바꿨다. 관객들이 알고 있던 김재규와 영화 속 김규평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영화 속 캐릭터에 현실의 인물이 덧붙여지고, 현실의 인물이 영화의 캐릭터로 재구성된다. 영화 속 김규평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시에 머릿속 기억을 더듬어보게 하는 것이다. 영화가 다루는 사건이 대한민국 역사에 미친 영향력이 큰 만큼 자꾸 현실을 의식하게 되기도 한다. 대신 만약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여지는 없다. 굳게 닫힌 묵직한 결말은 이 영화의 의미에 대해 자꾸 질문하게 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부족했으면 영화의 인상과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언제나 신뢰감을 주는 이병헌의 연기도 좋지만, 이성민의 영화로 볼 여지도 있다. 이성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무게중심을 단단히 잡으며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15세 관람가. 22일 개봉.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