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면 ‘그래서 왜 그런 거지?’라는 반응이 나와야 한다고 영화 찍기 전부터 계속 얘기했어요. 영화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목표였죠.”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다뤘다.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일명 ‘10·26 사건’이다. 41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18년 동안 이어진 독재 정권의 갑작스러운 종말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딸이 대통령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정치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김규평 역할을 맡은 배우 이병헌의 생각도 그랬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정치성향이 강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라고 했다. 영화가 확실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대신 이야기의 힘과 인물의 심리 묘사는 배우로서 매력적이었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출연할지)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고요. 정치적인 시선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늘 그랬듯이 이야기의 힘과 인물의 심리적인 묘사가 매력적이었어요. 정치적인 견해가 들어가거나 누군가를 영웅화하는 이야기라면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것 같아요. 감독이나 작가의 생각으로 규정짓는 영화도 있잖아요. 하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정치적인 시각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영화였어요. 인물들의 내면과 섬세한 감정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것이 주였죠. 역사적인 미스터리는 영화적으로도 미스터리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감독님도 같은 생각이라 그렇게 만들 거라고 얘기하셨죠.”
1970년생인 이병헌은 1979년 10월26일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흰소복을 입은 어른들이 길거리에서 땅바닥을 치며 오열하는 모습을 TV에서 봤다. 이병헌은 “어린 마음에도 굉장히 큰일이 일어났구나”라며 “약간 겁이 났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연기를 위해 사전 자료 조사도 했다. 인물 분석에 참고할 자료가 많았지만, 오히려 상상력에 의존하지 못할 것 같은 걱정도 됐다.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김재규라는 인물의 틀을 기반으로 김규평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실제 인물의 행동에 도움을 받은 장면도 있다.
“(김재규가) 법정에서 머리를 예민하게 쓸어넘기는 모습을 인상 깊게 봤어요. 아마 평소 머리 한 올도 내려오지 않게 올린 모습이 그 사람의 본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구치소) 안에 있을 때는 제품을 바를 수가 없잖아요. 그럼에도 옆으로 떨어지는 머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느낌이 보이더라고요. 그게 좋은 참고가 됐어요. ‘남산의 부장들’에서 내가 아주 예민해져서 곤두선 느낌을 표현할 때는 저 느낌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김규평이 곽상천 실장과 싸우고 머리를 만지는 것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묻자, 한참 생각에 잠겼다. 쉽게 특정 장면을 꼽을 수 없는 듯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마지막 장면을 언급했다.
“마지막에 어디로 가야 할지 김규평한테 물어보는 장면이 나와요.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을 짓거든요. 그 장면을 보면서 상황에 맞는 감정이 아닌 다른 데로 잠깐 빠지는 느낌을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결국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충성하던 인물의 혈흔을 본 거잖아요. 그 느낌은 또 달랐을 거란 생각을 해요.”
‘남산의 부장들’은 이병헌에게 또 다른 대표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우민호 감독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김규평의 변화를 잡아내기 위해 이병헌에게 많은 클로즈업 장면을 요구했다. 관객들은 조금씩 변하는 이병헌의 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서사의 굴곡을 느끼게 된다. 이병헌은 “내 표정을 어떻게 했을 때 어떤 감정이 전달되는지 알고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건 컴퓨터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클로즈업 장면을 연기할 때는 “그 상황 속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안에 갖고 있으면 전달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평소 더 좋은 연기를 위해 훈련하기보다는 무엇이든 잘 받아들이는 감정 상태를 만들려고 한다는 말도 했다.
“제일 중요한 건 배우로서 감정이 늘 말랑말랑한 상태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그 인물의 미묘하고 사소한 감정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느끼면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작품해석을 잘하기 위해 뭘 훈련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해석을) 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죠.”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쇼박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