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두 명의 영국군 병사가 있다.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는 에린무어(콜린 퍼스) 장군을 만나기 위해 좁은 참호를 걸어가고 있다. 함께 걷는 몇 분 동안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집에 가지 못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고, 왜 장군을 만나러 가야 하는지 툴툴대기도 한다. 당연히 모든 군인이 매일 같이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진 않는다. 언뜻 평화로운 전쟁터 한복판의 공기를 카메라는 조용히 실시간으로 담아낸다.
에린무어 장군은 두 사람에게 한 가지 미션을 던져준다. 함정에 빠진 2대대의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을 만나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것. 독일군에 의해 통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직접 편지를 전달하는 수밖에 없고 소수로 가는 것이 낫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 미션에는 블레이크의 형(리차드 매든)을 포함한 1600명의 생명이 달려있다. 생각보다 무거운 임무에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바뀐다. 이제 두 사람은 하루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던 독일군의 진지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 조용히 참호 밖을 응시하는 두 사람은 생각한다. 장군이 준 정보대로 그곳엔 정말 아무도 없는 걸까.
‘1917’(감독 샘 멘데스)은 일상의 아주 작은 사건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문제는 그곳이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전쟁터이고, 주인공이 전쟁을 치르는 병사라는 사실이다. 우연에 가까웠던 불씨는 옮겨 붙는 순간부터 거침없이 번지기 시작한다. 참호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정신없이 몰아치는 예측 불가한 상황들에 이리저리 휘둘린다. 잘못된 판단 하나, 짧은 순간의 방심에도 목숨이 오간다. 분명한 성격과 가치관을 가진 인물로 시작했던 평범한 두 사람은 조금씩 원래의 개성을 잃는다. 살아남는 것, 임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결국 한 발자국을 내딛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반부 두 사람을 움직이는 건 장군의 명령이다. 군인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명령이 그들을 지켜주지도, 총알을 피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은 불확실한 정보에 의지한 명령을 의심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까 불안해한다. 이야기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을 지나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뭔가에 홀린 듯이 움직이고 앞으로 걸어가는 이들을 관객은 신뢰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뭔가 변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순간, 한 발자국을 내딛게 만들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작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거대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빠르게 확장될 수 있는 건 단순히 이야기의 힘만은 아니다. ‘1917’은 한 대의 카메라로 인물을 가까이에서 따라다니며 끊지 않고 실시간으로 찍는 롱 테이크 기법을 활용했다. 상영 시작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한 번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지점을 제외하고는 119분 동안 쉬지 않고 인물들 옆에서 그들이 느끼는 경험을 함께할 수 있다. 감독은 4개월의 리허설을 거친 끝에 장면을 나눠 찍은 후 정교하게 이어 붙이는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을 활용했다. 과감하고 지독한 형식은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인물들이 보는 풍경과 걷는 길의 질척임, 고약한 냄새와 공기의 온도 등은 그 어떤 대사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준다.
하루가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다채로운 이미지를 담아낸 영상도 인상적이지만, 음악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화의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풍성한 내러티브를 만들어주는 건 적절히 사용된 음악의 힘이다. 짧고 간단한 이야기를 이렇게 멋지고 영화적인 순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오는 19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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