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뛰어난 실력을 타고났는데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인성은 어찌나 훌륭한지 자신의 사리사욕보다 팀의 공의를 앞세운다. 지난달 14일 종영한 SBS 금토드라마 ‘스토브리그’ 속 강두기(하도권)는 야구 팬들의 소망을 ‘몰빵’한 듯한 투수다.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유니콘 같은 선수! 그런 강두기가 현실 속 인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건 배우 하도권의 공이 컸다. 낮은 음성과 단단한 눈빛으로 강두기가 걸어온 여정을 보여줬다. 차분히 ‘스토브리그’와 작별하고 있던 하도권을 최근 서울 월드컵북로 쿠키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스토브리그’는 선한 영향력을 보여준 작품이에요. 캐릭터들의 선한 힘이 보시는 분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준 것 같아요.” 단 꿈의 여운이 남은 듯한 표정으로 하도권은 말했다. 하도권 역시 ‘스토브리그’와 강두기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자신의 신념을 따르던 강두기가 끝내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도권 역시 바른 길을 선택할 힘을 얻었다고 한다. “사람마다 삶의 포인트들이 있잖아요. 그때마다 강두기는 옳고 정의로운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저도 많이 위로받았어요.”
너무 완벽해 자칫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인물. 하지만 하도권은 “강두기에겐 모두의 꿈들이 모여있었기에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았던 것 같다”고 했다. 강두기를 현실 속 인물로 불러내려는 하도권의 노력도 한몫했다. 그는 “다른 선수를 깔보거나 훈시하는 대신, 함께 공유하고 소통하는 자세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임동규(조한선)에게 원정 도박 자진 신고를 설득하는 장면에선, ‘인생 똑바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대사 앞에 ‘나도 부족하지만’이란 전제를 덧붙이기도 했다. 혹여 강두기가 임동규를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보일까 봐 추가한 대사였다.
하도권은 강두기를 표현하기 위해 5개월간 투구 레슨을 받고 촬영 중에도 연습을 이어갔다고 한다. 팔꿈치에 염증이 생겨 작품 종영 후까지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야구의 매력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최근 타격코치 민태성 역의 배우 서우철이 속한 연예인 야구단 ‘공놀이야’에 가입했고, 이달 중 개막하는 2020 KBO 리그에선 키움 히어로즈를 위해 시구에도 나선다. 키움 히어로즈의 열혈 팬인 아들에게 요즘 그는 “하나님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야구는 인생과 비슷한 것 같아요. 야구엔 만루홈런이라는, 4점짜리 홈런이 있잖아요. 그래서 9회말 2아웃 상황에서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승부를 뒤집을 수 있죠. 인생도 마찬가지고요.”
하도권에게도 9회말 2아웃 타석에서 만루 홈런을 친 것 같은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대학 입시 때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체육대학 진학을 희망하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에 입문했다. 남들보다 늦은 시작, 재수를 준비하려는데 “엄마 빼곤 모두가 재수를 반대”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심지어 연습 도중 성대를 다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배짱이었는지, 하도권은 ‘고’(Go)를 외쳤다고 한다. 결과는, 서울대학교 성악과 합격. 하도권은 “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걸 경험한 것”이라며 “그 때의 기억이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됐다”고 말했다.
‘스토브리그’를 만나기 전까지도 하도권에겐 ‘버팀’의 시간이 길었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2014년 무대 연기를 접고 TV의 문을 두드렸지만, 2016년 웹드라마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하기 전까지 긴 공백을 가져야 했다. 당시 메가폰을 잡았던 조수원 감독이 그를 좋게 평가해 SBS ‘의사요한’에도 불러줬다. 하도권은 조 감독을 “꿈을 놓지 않게 해주신 분”이라며 고마워했다. 긴 시간 자신을 응원해준 아내도 든든한 지원군이다. 하도권은 아내를 ‘여(민정)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소속사 대표처럼 자신을 믿고 후원해줬다는 뜻이란다.
이를 도(到), 권세 권(權). 뮤지컬 배우로 활동할 땐 본명 ‘김용구’를 썼지만, TV로 전향하며 하도권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성씨 ‘하’는 스페인 출신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에게서 따온 것이다. 바르뎀과 가족이 되고 싶었단다. 하도권은 이 이름에 “내가 이끌어 나가는 삶, 그럴 힘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돌아보면 그의 삶은 언제나 도전의 연속이었다. 성악과 진학을 결정했을 때, 오페라가 아닌 뮤지컬 무대에 올랐을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극단 생활을 했을 때, 무대에서 내려와 카메라 앞에 설 때…. 하도권은 “지금 이 과정들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 지는 먼 훗날에 돌아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저는 ‘스토브리그’를 말할 때 ‘오아시스’라는 표현을 써요. 제가 사막을 걷다가 ‘스토브리그’라는 오아시스를 만난 거라고요. 여기에서 단물도 많이 마셨고 좋은 기억도 생겼지만, 제 종착역은 아니잖아요. 목 축였으니 다시 걸어야죠. 앞으로 사막도 나올 테고 더 힘든 일도 있겠지만, 그래도 걸어 나아가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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