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대학 야구장은 대개 썰렁하다. 재능 있는 선수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팀에서 선발해가는 데다, 대학 졸업까지 기다리자니 선수의 나이가 많아져 프로구단 스카우터들의 발길이 끊겨서다. 지난달 종영한 SBS 금토드라마 ‘스토브리그’는 이 대학생 선수들에게 잠시나마 조명을 비춰줬다. “아무도 안 보는 노력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서글프겠냐”는 드림즈 스카우터 양원섭(윤병희)의 말과 함께.
‘스토브리그’에서 드림즈 운영팀 막내 한재희를 연기한 배우 조병규는 이 장면을 보며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보조 출연자로 시작해 드라마 포스터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자신이 지나온 시간들이 떠올라서다. 최근 서울 학동로3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스카우트되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야구의 꿈을 잃지 않으며 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나와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며 “대학 야구 장면은 반드시 방송에 나가서 ‘우리도 응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병규는 ‘스토브리그’에서 ‘보이지 않는 밥상’이 되길 자처했다. 한재희는 ‘능력은 모자라지만 열정적이고 낙천적인 막내 직원’으로 오피스 드라마의 전형적인 캐릭터지만, 조병규는 “내 리액션이 있어야 단장님과 선수들의 대사가 임팩트 있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했다. 이신화 작가는 그런 조병규에게 ‘우리 드라마에서 제가 고집해야 했던 이야기들을 구현하려다 보면 생기는 큰 고민들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재희가 씩씩하게 해내고 있었다’는 편지를 써줬다. 조병규의 노력이 응답받은 셈이다.
“사실 재희는 희노애락이 많거나 입체적인 인물은 아니에요. 극의 중심을 끌고 나가는 편도 아니라, (시청자에겐) 이 역할이 눈부시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재희와 세영(박은빈) 팀장님이 쌓아놓은 장면들 때문에 선수들의 임팩트도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발견한 순간부턴, 내가 돋보이려는 욕심은 내려놓고 필요한 리액션을 하게 됐어요. 재희가 드림즈의 일원으로 보이지 않는 일들을 찾아서 하려고 했던 것처럼요.”
스포트라이트가 비껴간 곳에서 노력한다는 건 서글프고도 치열한 일이다. 조병규는 이런 “언더독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데뷔 후 5년간 70여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존감과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 이름도 없는 보조출연으로 시작해 배역의 크기나 작품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었지만, 정작 자신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조병규는 “하지만 덕분에, 또래 연기자들에 비해 단단하게 커올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미소지었다.
지난해 출연한 JTBC ‘스카이캐슬’은 여러모로 조병규를 성장하게 했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준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성숙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됐다. “제가 생각지도 못한 언행 때문에 활동에 발목이 잡히면 정말 개탄스럽겠더라고요. 예전에 연기에만 몰두했는데, 지금은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매사에 진지한 성격 덕에 주변에서 ‘애늙은이’라고 불린다는 그의 실제 모습이, ‘스카이캐슬’ 속 차기준(조병규가 연기한 배역)과 다르다는 이유로 받았던 조롱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짠해졌다. 하지만 조병규는 이것을 “호의적인 시선에 대한 책임”이라고 표현했다. 작품에 대한 애정과 다음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한, 자신이 당연히 맡아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조병규는 뉴질랜드에서 유학하던 중학생 시절부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연기 수업에서 처음 대사를 내뱉었던 순간을 그는 여전히 기억한다. 뭔가가 뜨겁게 올라오는 것 같았단다. 축구를 포기하고 진로를 정하지 못해 “하루하루 죽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던 그에게, 이런 뜨거움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부턴 생일, 성탄절, 명절 등 기념일을 모두 현장에서 보냈을 만큼 바빴지만, 처음의 열정을 잃은 적은 없었다.
“저는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엄격한 편이에요. 항상 매몰차게 채찍을 휘두르죠. 하지만 힘든 시간을 잘 버틴 데 대한 칭찬은 해주고 싶어요. 무릎 꿇고 포기하거나, 다른 데 눈 돌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죠. 하지만 그때마다 작품을 통해 열정을 회복하고 일하면서 휴식을 찾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 단단하게 커온 저에게 조금의 칭찬을 해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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