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무너졌다. 꿈과 현실의 경계도, 해외 영화제에 대한 신뢰도. 악몽에서 깨면 새로운 악몽이 펼쳐진자. 한 번 잃은 길이 어디에서 다시 시작되는지 찾기 어렵고 찾고 싶지 않다.
‘악몽’(감독 송정우)은 영화감독 연우(오지호)의 딸 예림(신린아)이 세상을 떠나며 시작한다.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충격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연우. 어느 날 그는 허리에 문신을 새긴 의문의 여인(차지헌)이 자신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한 편의 꿈을 꾼다. 연우는 꿈속에서 만난 여인과 똑같이 생긴 수(차지헌)를 영화 캐스팅 현장에서 만나고 그녀를 따라 클럽으로 향한다. 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촬영이 시작되며 연우가 살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꿈속에서 눈을 뜬다.
흥미로운 소재다. 제목부터 주인공의 꿈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악몽’은 꿈과 현실을 뒤바꾸며 무엇이 본질인지 찾는 게임을 제안한다. 야바위꾼의 정신없는 말과 빠른 손놀림처럼 ‘악몽’ 역시 맥락을 알 수 없는 화면 전환과 역할 변경으로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둘, 혹은 세 개의 세계가 공유하는 공통 키워드를 추리의 근거로 제시하는 친절함도 보여준다. 영화가 제안한 추리게임이 풀리는 것과 발맞춰 이야기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전개도 흥미롭다.
다만 흥미로운 소재와 구성이 흥미롭지 않게 풀린다. 주인공 연우의 감정에 이입하기 힘든 것이 문제다. 처음 세워져 있었을 두 세계의 이야기를 꼬아서 펼쳐놓는 핵심 장면들에 주의를 기울였을 뿐, 전달 방식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불안한 부부 관계 등 기본적인 드라마 없이 갑자기 미스터리 스릴러로 건너뛰면서 안정감을 잃고 흔들린다. 일부러 영화를 불안하게 흔드는 것과는 다르다.
연우에게 이입하기 힘든 이유는 여러가지다. 사랑하던 딸의 사망 사건이 아니어도, 이미 연우가 바라보는 세계관에는 문제가 많다. 자신의 작품에 그린 여주인공과 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를 대하는 태도는 연우의 많은 걸 설명해준다. 가족을 대하는 태도 역시 공허하다. 나중엔 딸의 죽음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딸의 죽음을 겪는 자신의 심경에 더 몰입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과 고통을 줄이기 위해 주변사람을 괴롭히는 주인공. 그에게 이입할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태도 역시 불편한 요소 중 하나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죽거나 고통 받는 것 이외에 없다. 아내 지연(지성원)와 배우 수를 마치 도구처럼 대하는 연우에게 여성들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삶을 존중해줄 여유는 없어 보인다. 혹 장르적 재미를 얻었다 하더라도 환영받지 못했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악몽’이 2020년에 개봉하는 현실이 누군가에겐 당장 깨고 싶은 ‘악몽’이지 않을까. 12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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