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아홉 명의 가족 구성원이 개개인마다 다른 온도로 가부장제와 이별하는 여정을 그리고 싶었어요.”
영화 ‘이장’(감독 정승오)은 진입장벽이 낮은 독립영화다.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오남매가 큰집으로 떠나는 로드무비는 지금도 어느 집에서 일어나고 있을 법한 우리 일상 속 이야기다. 마땅한 주인공도, 중심 사건도 없이 ‘이장’은 차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가장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가장 현재적인 방법으로 풀어내는 영화의 분위기는 심각하기보단 따뜻하고 재미까지 있다.
‘이장’은 다수의 단편영화를 연출해왔던 정승오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코로나19로 한 차례 미룬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의 출발점을 묻자, 감독은 2016년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2016년에 찍은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이란 단편영화 내용이 네 자매가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는 이야기였어요. 그 다음해에 문득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네 자매는 어떻게 지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에 관한 막연한 상상을 시작하면서 제 가족들과 어릴 적 느꼈던 것들을 소환하기 시작하더라고요. 한 번은 저희 할머니의 묘를 성묘하고 내려오는 길에 공동묘지를 강제 이장하는 풍경을 본 적이 있어요. 그 장면이 제게 인상 깊게 남았고, 자연스럽게 제사에 관한 기억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또 누군가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의미 있는 세리모니인 제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차별받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건 대부분 가족 내 여성들이었고요. 여성들의 차별로 귀결되는 시스템의 정체는 지금 많이 쇠약해졌지만 뿌리 깊게 남아있는 가부장제가 아닐까 싶어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이장’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건 대부분 여성들이다. 자신 있게 각자의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서로 배려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스크린을 수놓는다. 반대로 남성들은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고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갈등의 원인도, 균열의 시작도 남성들이다. 정 감독은 가부장제와 이별해야 하는 존재는 남성이라고 설명했다.
“극 중 큰아버지(유순웅)는 생존하기 위해서 가부장제를 지키는 끝자락에 있는 인물이에요. 승락(곽민규)이는 가부장제 환경에서 성장해왔지만, 마음속엔 뭔가 잘못된 걸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인물이고요. 누나들처럼 적극적으로 주창하진 못하고 관성화된 거죠. 동민(강민준)이는 가부장제 시스템과 헤어지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제 바람이 많이 들어간 인물예요. 전 가부장제와 이별해야 하는 존재는 남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족 내 여성들은 무엇인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행동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놓지 않고 헤어질 듯 하면서 못 헤어지고 뿌리를 잡고 있는 존재는 남성이라고 생각해요.”
‘이장’은 가족이라는 한국사회의 민감한 면을 그리면서도 불편한 지점이 거의 없는 영화다. 정 감독이 자신의 시선과 메시지를 고집하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애쓰며 작업한 덕분이다. 정 감독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흡수하려고 했다”고 표현했다.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이장’ 시나리오를 쓰진 않았어요. 보통 가족 내 차별이 여성들에게 쏠려 있고, 차별의 근원적인 외피가 가부장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 스스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35년 동안 남성으로 살면서 직접 느끼거나 공감하지 못했던 차별이 있을 수 있잖아요. 최대한 공감하기 위해 주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업하려고 노력했어요. 시나리오 작업을 하거나 현장에서도 여성 스태프, 여성 배우님들과 얘기를 많이 했고요. 제가 고집부리는 것 보다 계속 흡수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최대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정승오 감독은 ‘이장’을 만들며 가장 많이 참고했던 작품으로 영화 ‘토니 에드만’과 ‘미스 리틀 선샤인’, ‘걸어도 걸어도’를 언급했다. 복잡하고 감정의 폭이 넓은, 다층적이면서 모순되고 인간적인 인물과 관계에 관한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인 차기작 역시 가족들의 이야기라며 웃었다.
“‘이장’은 우리 삶과 밀착돼 있는 영화라고 생각을 해요. 관객들에게 ‘이장’이 우리 가족은 어떤 가족인지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너무 일상적이라서 몰랐던 우리 가족의 한계는 무엇인지 한 번 같이 고민해 봐도 좋을 것 같고요. 가족이 갖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어떤 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족들과 돈독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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