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 정부가 n번방 사건을 신종 디지털 성범죄로 규정한 것에 대해 뒷말이 나오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최근 공분을 낳고 있는 이른바 'n번방' 사건과 관련해 이를 ‘신종 디지털 성범죄’라 명명했다. '신종'이 붙은 이유에 대해 여가부는 인터넷 환경의 변화로 영상물 공유가 신속·수월해졌으며, 익명성이 높은 플랫폼을 통해 불특정 다수가 범죄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가부와 법무부·경찰청·대검찰청 등은 신종 범죄의 등장에 대응해 양형기준과 대책을 새로이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여가부의 말처럼 n번방 사건은 정말 예측할 수 없었던 신종 범죄일까?
범행에 악용된 플랫폼만 달라졌을 뿐, n번방은 제2의 ‘소라넷’과 다름없다. 지난 1999년 개설된 음란물 공유 사이트 소라넷은 국내 법망을 피하고자 오스트리아·캐나다 등 해외에 서버를 두고 운영됐다. 소라넷에서는 ‘몰카’를 비롯해 피해 여성을 협박·폭행해 찍은 불법촬영물이 유료로 공유됐다. 이용자들은 익명의 불특정 다수로, 소라넷 접속을 위한 IP주소가 공지된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한 인원은 10만명이 넘었다.
n번방이 운영된 텔레그램은 해외에 서버를 둔 외산 채팅 서비스다. 보안을 강화한 텔레그램의 특성탓에 경찰 수사, 영상물 삭제, 이용자 정보 파악이 수월치 않다. n번방 운영자들은 피해 여성을 협박해 얻어낸 영상물을 대화방에 입장한 불특정 다수에게 유료로 공유했다. 여성시민단체가 연합한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60여개 n번방에 중복인원 포함 약 26만명, 중복 제외 5만명이 입장한 것으로 추정했다.
즉, 디지털 성범죄 대응을 위한 과제는 이미 10년 전부터 명확했다는 것이다. 공대위 측은 ▲수사기관의 국제 공조체계 구축 ▲영상물 재공유 2차 가해 예방 수단 마련 ▲불법 영상물 시청·소지 처벌 ▲성범죄 양형기준 강화 등을 통해 n번방 사건을 예방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 가운데 현재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반영된 사안은 없다. 재발방지 대책이 미비해 유사 범죄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승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은 “여가부를 비롯해 수사기관이 n번방을 신종 범죄로 칭하는 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며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할 골든타임을 여러 번 지나치고도 책임을 피하려는 핑계”라고 지적했다. 그는 “소라넷뿐 아니라 웹하드 카르텔, 다크웹, 카카오톡 ‘빨간방’ 등의 사건이 끊임없었다”며 “정부는 그때마다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겠다고 약속했지만, n번방 등장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n번방을 신종 디지털 범죄로 규정한 것에 대해 “10년 전에는 없었던 텔레그램이라는 플랫폼에서 발생한 범죄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텔레그램 플랫폼 특성상 범죄자들의 범행 은폐·도주 속도가 이전의 디지털 성범죄자들에 비해 빨라졌다”며 “이같은 변화에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관계부처들이 협업하겠다”고 해명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n번방 수사 방침에 대해 “모든 관련자들을 적발하여 무관용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하고, 성착취 불법 영상물 확산 방지 및 삭제 등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수사상 나타난 제도 문제를 검토해 제도 개선책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소라넷 수사 결과는 운영자 4명 중 1명에게 4년형이 선고되는 것에 그쳤다. 소라넷에 유포된 불법영상물을 소비한 단순 회원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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