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고 문득 지난겨울 올레를 걸으면서 보았던 감귤 과수원 모습이 떠올랐다. 가는 곳마다 울타리 근처에 버려져 썩어가는 귤이 안타까웠다. 아깝기도 했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상품성이 없어 폐기된 귤이었다. 사실 지나치게 큰 귤은 신맛도 없고 단맛도 없다. 일반 감귤은 물론 황금향, 천혜향, 레드향, 한라봉 등 특수 품종도 마찬가지다. 값이 싸다고 해도 이런 귤을 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품성 없는 싱거운 귤이라 할지라도 껍질을 제거하고 압착해 즙을 짜면 놀랄 만큼 맛있는 음료가 된다. 귤 농사를 짓는 지인이 맛보라며 준 귤 주스 몇 봉이 아직 냉장고에 있다. 귤껍질을 까지 못해 많이는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신맛 적고 달콤한 감귤 주스 한 모금 넘기며 공공 예산이 들어가더라도 이렇게 주스로 만들어 필요한 곳에 무상으로 공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입원 3일째 되는 날이었는데 아버지 기침과 가래는 조금 호전된 듯했고, 어머니 혈당과 혈압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간병인이 주말에 하루는 쉬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며 병실에 들렀다. 토요일 아침 일찍 와서 간병인과 교대해 어머니 아버지 병실에 있다가 일요일 아침 출근하는 간병인과 교대하기로 했다.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일찍 올게요.” “오냐. 여기 걱정은 마라.” 그렇게 아버지는 퇴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집에 와 옷을 갈아입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저녁 8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아버지 이름을 말하며 보호자가 맞는지 묻는다. 순간 어머니께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심폐소생술 중이니 빨리 병원으로 오란다. 이것저것 물을 겨를도 없이 옷을 입고 다시 지하철에 올랐다. 9시가 지나고 있는데 아버지 주치의가 전화를 했다. 1시간째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단다. 간호사가 저녁 약을 드리려고 8시쯤 병실에 갔다가 발견했다고 하니 심정지가 발생한 시간을 정확히 모른 채 다만 매뉴얼에 따르고 있었을 것이었다.
폐기능이 겨우 동년배의 50 퍼센트를 넘기고 있었던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이야기 하고 소생가능성이 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 해달라고 했더니 거의 없다고 한다. 한 시간의 심폐소생술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터라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했다. 지금은 냉정하게 현실을 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 선생은 에크모 치료를 언급했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회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는 규정상 보호자가 현장에 있어야 심폐소생술을 중단할 수 있다고 했다. 재차 직원임을 이야기 하고 인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이라 아직 1시간 넘게 걸리니 소생가능성이 없는데 규정 때문에 선생님들 더 고생하게 할 수는 없다고 설득을 했다. 그날 전화상으로 아버지 사망 선고를 들었다. 그렇게 내 하늘이 무너졌다.
그 곁은 한두 번 지나가지 않았는데 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번영로는 제주시에서 동부의 중산간 지역을 시원하게 관통해 남동부의 표선까지 연결되는 4차선 도로다. 이 도로 주변에 있는 오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오름이 거문오름이다. 거문오름을 지나면 성불오름과 비치미오름이 있고 성읍민속마을을 거쳐 표선에 이른다.
제주에서 출발해 거문오름으로 좌회전 하는 교차로의 도로 표지판에 우회전하면 산굼부리 방향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을 뿐 전방 오른쪽의 부대오름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다. 차량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부대오름으로 가려 하면 산굼부리 방향으로 우회전하도록 안내를 하는데 막상 가서 보면 부대오름 입구의 길은 철문으로 막혀 있다. 부대오름 입구는 사거리를 지나면서 보이는 오른쪽의 승마장 안내 표지판을 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지만 어느 곳에도 공식적으로 이곳을 안내하지 않는다.
부대오름에 관한 안내가 부실한 만큼이나 이 오름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지는 않다. 어떤 이는 일제강점기에 부대오름의 분화구 안에 일본의 부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부대오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화전과 관련된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그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부대오름은 북동쪽으로 벌어진 ㄷ자형 오름인데 이만큼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오름은 없다.
부대오름 탐방로는 전체적으로 울창한 삼나무 숲을 통과한다. 해발 468.8m로 소개되어 있지만 실제 높이는 109 m이므로 능선까지 오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삼나무가 우거진 숲이 다 그러하듯 이곳도 나무 외에 다른 식물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부대오름은 능선에 올라서고 나서야 그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편안하게 다양한 나무와 풀을 스치며 걷는 능선길이 어느 오름보다 길고 오름 밖의 세상은 나무들이 막아주고 있어서 아무 방해 없이 깊은 사색에 잠기며 걸을 수 있다. 능선 길은 남서로 향하다가 어느새 남쪽으로 그리고 다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그 속에서 걷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능선 길 끝에서 올라올 때보다는 훨씬 길 내리막을 만난다.
그리고 그 내리막길을 빠져나오면 잘 다듬어진 임도를 만나는데 순간적으로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정면에 부소오름이 있으니 남쪽을 보고 서 있음을 짐작한다. 이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몇 걸음 나가면 부소오름으로 향하는 길을 만난다. 부소오름 아래에서 임도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100여 m 거리에 부소오름 입구가 있다. 부소오름은 부대오름 곁에 있지만 규모가 작아 붙여진 이름인데 옛 이름은 새몰메라고 한다. 새말메로 풀 수 있는데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부소오름은 전체적으로 그 형태가 모호하지만 부대오름과는 달리 능선에 오르기까지 곰솔이 매력적인 숲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사이로 적당히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풀과 덩굴과 나무가 다양하게 얽혀 있다. 능선 정상까지는 꽤 멀지만 지루하지 않은 이유다. 능선 가까이에서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오름 밖 풍경도 제법 시원하게 보여 준다. 하산 길은 삼나무와 편백숲을 통과하기 때문에 오르는 길보다는 지루한 느낌이지만 다 내려와서 만나는 임도가 높이 솟은 나무 사이로 편안하게 펼쳐진다. 임도에 서서 비로소 하늘을 다시 찾은 느낌이 든다.
찾는 이 많지 않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오름일지라도 제주의 오름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부대오름과 부소오름 역시 숲을 좋아한다면 걸을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