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처음 떠올린 건 어린아이가 덤프트럭을 모는 이미지였어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멸망 이후) 장르인 ‘반도’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했죠.”
오는 15일 개봉을 앞둔 영화 ‘반도’(감독 연상호)는 2016년 개봉한 ‘부산행’(감독 연상호)의 4년 후를 그린 후속편이다. 하지만 ‘부산행 2’가 아닌 ‘반도’라는 새 이름을 붙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만, 등장인물과 장르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다.
‘반도’는 4년 전, 전대미문의 재난으로 하루 만에 국가 기능을 잃어버린 한국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군인 정석(강동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고 다시 반도로 들어가는 정석이 폐허가 된 땅에서 살아남은 민정(이정현) 가족을 만나며 탈출 계획을 꿈꾼다. 배우 강동원, 이정현, 이레 등이 주연을 맡았고,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다시 연출을 맡았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개최되지 못한 제73회 칸 영화제에 오피셜 셀렉션(Official Selection)으로 선정됐고, 해외 185개국에 선판매되는 등 개봉 전부터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의 흥행 성공과 함께 ‘반도’의 출발점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는 ‘부산행’ 촬영을 위해 전국으로 로케이션 헌팅을 다니던 당시 멋진 폐기차역들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만약 ‘부산행’의 후속편을 만들면 이런 곳에서 폐허가 된 땅을 찍어야겠다는 이야기를 농담삼아 했다. 또 ‘부산행’ 이후 후속편 이야기를 많이 들은 것도 영향이 컸다. 직접 후속편의 시나리오를 써서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연 감독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다룰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부산행’의 세계관은 이어받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꿈꿨다. ‘부산행’에 등장한 인물, 소재 등이 ‘반도’에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 역시 이유가 있었다.
“전 두 가지 종류의 영화가 있다고 생각해요. 배경 설정이 주인공인 영화와 캐릭터 중심의 영화가 있죠. 예를 들면 제 전작인 영화 ‘염력’이나 tvN ‘방법’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곧 중요한 소재예요. ‘부산행’은 영화의 설정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산행’에 출연한 캐릭터가 후속편에도 계속 나오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했죠. ‘부산행’이나 ‘반도’에 등장하는 메인 캐릭터들은 다 보통사람들이거든요. 평범한 사람이 겪는 엄청난 일이라는 콘셉트인 거죠. 별개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올해 초 공개된 넷플릭스 ‘킹덤’ 시즌2부터 최근 개봉한 영화 ‘#살아있다’에 ‘반도’까지. 연 감독의 ‘부산행’으로 한국에서 처음 문을 연 좀비 장르는 ‘K좀비’라고 불리며 주목받고 있다. 연 감독은 좀비를 ‘오픈 소스’(Open Source)라고 표현하며 ‘반도’ 역시 “‘부산행’과 또 다른 좀비물로 그리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좀비를 제가 만들어낸 게 아니잖아요. 조지 로메로 감독이 만든 오픈 소스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살아있다’도 최근에 봤는데 ‘부산행’ 세계관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그렇게 연결해도 큰 상관이 없어 보이더라고요. 좀비라는 오픈 소스의 강점이 그렇게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점 같아요. 조지 로메로 감독이 좀비에 저작권을 심어놨으면 엄청난 돈을 벌었거나, 좀비가 이렇게까지 대중적인 장르가 안 됐을 수 있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런 지점이 재밌기 때문에 ‘반도’를 ‘부산행’을 이어서 하는 것보다, 또 다른 좀비물로 만드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표적으로 그래서 제목이 ‘반도’가 됐어요. ‘부산행 2’로 하자는 얘기도 많았지만, 부산이 나오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하냐고 했어요. ‘반도’의 후속편을 만든다고 해도 ‘반도 2’로 가진 않을 것 같아요.”
‘부산행’이 빠르게 달리는 KTX 열차라는 설정으로 속도감을 줬다면, ‘반도’에선 차량이 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어두운 빈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떼로 덤벼드는 좀비의 이미지는 ‘반도’의 상징이기도 하다. 연 감독은 카체이싱 액션을 위해 애니메이션으로 사전 작업을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카체이싱 장면은 처음엔 더 만화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워쇼스키 자매가 만든 영화 ‘스피드 레이서’의 원작인 만화 ‘마하 고고’를 떠올렸어요. 그에 근접하는 정도까지 원했던 것 같아요. 차로 좀비를 맞춰서 어딘가에 골인시키는 만화적인 아이디어도 냈는데, 이런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무술 감독님과 CG팀, 촬영 감독님이 현실적이면서 만화 같은 이미지의 액션 시퀀스들을 짜려고 3개월 정도 회의를 했어요. 미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하고 촬영에 들어갔죠. 확실한 건 ‘부산행’ 때였으면 못 만들었을 것 같다는 점이에요. 불과 4년 전인데 기술이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흥행에 성공한 ‘부산행’ 후속작이란 부담감을 이겨내는 것도 필요했다. 이젠 대중의 관심을 창작자로서 운이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려 한다. 최대한 대중의 요구에 맞추도록 노력하는 것이 연상호 감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부담이 없을 수는 없어요. 워낙 많이 기대를 해주시니까요. ‘염력’ 때도 기대나 관심이 많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당연히 ‘반도’에도 기대가 크다는 걸 알아요. 언젠가부터는 부담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창작자로서 운이 좋은 관심이라고 생각하려 하죠. 창작자로서의 개인적인 평가와 많은 관심을 받는 건 별개의 문제잖아요. 결국 영화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결과를 추구하지만 맞아떨어지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걸 맞춘다면 제가 엄청 재벌이 됐겠죠.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대중의 만족도를 맞춰보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하는 거겠죠. ‘부산행’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제 옆에서 같이 기획해주시는 분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좋은 결과물을 내려고 노력해왔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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