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점·소악도' 등 5개 섬에 이어진 순례자의 길
- 한국의 산티아고로 불리는 12km 순례길에 만나는 12 예배당
- 노두길은 명상의 공간… 넘치면 기다리고, 빠지면 건너고
- 코로나19로 지친 몸과 마음, 위로와 안식은 나그네 몫
- 종교를 떠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쉼터
[쿠키뉴스] 전남 신안 ·곽경근 대기자 = 여름휴가 시즌이다. 코로나19로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천하면서 위로와 안식을 받은 만한 특별한 비대면 여행지로 어디가 좋을까? 조용히 명상하면서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멈춘 공간이 있다.
전남 신안군 증도면 앞바다 갯벌에 박힌 보석처럼 작은 섬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이 바로 그 곳이다.바다에 떠 있는 모섬인 증도면 병풍도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등 5개 섬은 노두길로 한 섬처럼 이어져 있다. 밀물 때 섬과 섬을 잇는 노두길이 바다에 잠겨 다시 5개의 섬으로 변하는 곳이다. 오래전 섬과 섬 사이 갯벌에 돌을 쌓아 만든 징검다리 길이 노두길이다. 지금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차량 통행도 가능하지만,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져야만 차마가 다닐 수 있어 ‘기적의 순례길’로도 불린다.
순례길 사이사이의 한두 사람 정도 들어가 기도할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은 종교를 떠나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 속 성소이다.“우리 섬은 신안군에서도 오지입니다. 외부인이 거의 찾지 않고 섬에 살던 젊은이들은 한 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섬이 무인도가 될 것 같은 위기감에 주민들이 뭉쳤어요. 그래서 열심히 사람이 찾아오는 섬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조범석(67) 기점·소악도 가고 싶은 섬 추진위원장의 설명이다.
이런 주민들의 노력을 평가한 전라남도는 2017년 기점·소악도를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하고 40억 원을 지원 중이다. 신안군 증도면은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며 한국 성결교 최초의 여성순교자 문준경(1891~1950) 전도사가 섬마을 전도를 위해 찾던 사명의 길이란 것에 착안했다.
신안이 고향인 그는 1년에 고무신이 8켤레나 닳았을 정도로 열정적인 선교를 했다고 한다.
군과 주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이어가던 중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모티브를 얻어 5개 섬을 순례자의 섬으로 칭하고 ‘12사도(使徒) 순례길’을 조성했다.
삶에 지쳤거나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이 섬을 찾아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자는 취지다. 모섬인 병풍도를 제외한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을 잇는 12㎞ 순례길에 예수의 12제자를 상징하는 작은 예배당을 한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온 11명의 건축미술가가 개성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기점도와 소악도 주민들은 흔쾌히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다.노두길을 따라 섬 예배당을 잇는 길을 ‘산티아고’에 빗대어 사람들은 ‘섬티아고’로 부르기 시작했다.
12 사도의 집은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종교가 없는 일반인에게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종교를 떠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한다.
가고 싶은 섬 ‘기점·소악도 순례길’은 대기점도 대기점 선착장의 파란 지붕 베드로의 집 옆에 있는 작은 종을 치면서 시작한다.
1번 베드로의 집은 건강의 집으로 이름 지었다.
그리스 지중해 연안 산토리니의 한 점을 옮겨 놓은 듯하다. 코발트블루 사파이어색 둥근 지붕 아래 흰 회벽으로 마감했다. 바다와 어울리는 산뜻한 색감이다. 예배당 내부는 특별한 장식이 없으며 간결하다. 삼지창 벽화가 있는 부속건물은 반전이다. 아름다운 공중화장실이다. 베드로의 집 옆에 세워진 종을 치면서 순례길의 시작을 알린다.
300m 길이의 곡선 방파제 끝에 순례객의 편의를 위해 전기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대여료는 반나절 5,000원, 하루 10,000원이다.
2번 안드레아의 집은 생각하는 집이다.
병풍도 노둣길 입구 북촌마을 동산에 두 개의 높고 둥근 지붕이 있는 건축미술 작품으로 단단하고 아름다운 외관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하늘색 돔은 양파를 형상화한 것이고, 첨탑에 있는 고양이는 ‘고양이 천국’ 대기점도를 상징한다.
대기점도에는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이 살고 있는 고양이 천국이다. 섬의 집집마다 부엌과 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고양이. 약 30여 가구의 주민들과 300~400마리에 이르는 고양이들이 말 그대로 동거 중이다. 30년 전에 마을이 들쥐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섬으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한 것이 이 섬에 고양이들이 살게 된 동기이다.
3번 야고보의 집은 그리움의 집이다.
논둑길을 따라 작은 저수지 주변 숲속의 작은 예배당이다. 심플한 디자인에 로마식 기둥을 입구 양쪽에 세워 안정감이 돋보이다. 내부 흰 벽면에 에밀레종의 비천도가 양각된 것은 아이러니다.
논두렁과 밭길을 보며 10여 분 걷다 보면 4번 요한의 집으로 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산길을 따라 1km를 지나면 남촌마을 입구에서 태국 사원같은 건축물을 만난다.
4번 요한의 집은 생명평화의 집이다.
하얀 원형의 외곽에 지붕과 창은 아름다운 스텐인드그라스로 장식되었다. 치마처럼 펼쳐진 계단과 예배당 입구의 염소 조각이 눈길을 끈다. 염소를 키우는 오지남 할아버지가 땅을 기증했고, 작가는 조각으로 보답했다.
5번 필립의 집은 행복의 집이다.
바다와 접한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프랑스 작가 장미셀의 작품으로 프랑스 남부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 인근 바닷가에서 주워 온 갯돌로 벽돌 사이를 메우고, 주민이 사용하던 절구통으로 지붕을 마감하는 등 지역의 정서를 담으려 한 노력이 돋보인다.
취재진을 안내한 조재갑(63)씨는 작가 장미셀과 친했었다며 지붕의 절구통도 자신이 구해줬다고 으쓱한다. 작가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벽돌 한 장 쌓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벽돌 한 장 놓고 동네 한바퀴 돌고 오곤 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소기점도로 연결되는 217m 길이의 노두길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6번 바르톨로메오의 집은 감사의 집이다.
기점도 호수 위에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이는 색유리로 된 쉼표 모양의 조형물이 그림처럼 떠 있다. 목조와 통유리로 자연을 흡수하는 우아한 형태의 건축미술이다. 배를 타고 건너야 기도할 수 있게 설계했다.
하지만 올해 안에 유리로 된 다리를 설치해 접근이 용이하게 할 계획이다. 밤이 되면 은은한 조명이 수면에 반사된다.
7번 토마스의 집은 인연의 집이다.
호수 위 바르톨로메오의 집을 지나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작은 언덕 위 ‘작가들의 작업실’을 지나면 방파제 갈림길에 이정표가 서 있다. 우측에 서 있는 ‘토마스의 집 200m’ 이정표를 따라간다. 잔디밭 언덕의 하얀 건물은 바다를 보고 있다. 진한 파란색 문과 창틀이 특징이다.
신비한 빛깔의 푸른 안료는 모로코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단정한 사각형의 흰색 건축물로 별들이 내려와 박힌 듯 구슬 바닥과 푸른색 문이 인상적이다. 좌측 벽에는 오병이어의 조형물이 양각되어 있다. 순례길 중 가장 한적한 곳이다.
8번 마태오의 집은 기쁨의 집이다.
소악도 갯벌 위에 세운 건축미술 작품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정면으로 보인다. 황금빛 돔 지붕은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을 닮았다.
노두길 중간 갯벌 위에 터를 잡았다. 황금색 지붕은 기점·소악도에서 많이 재배하는 양파를 형상화했다.
내부는 사방으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고 문을 열면 맞바람이 불어 답답했던 마음이 일시에 사라진다.
9번 작은 야고보의 집은 소원의 집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정신이 밀알이 된 소악교회를 지나 갈림길 우측 둑방길 끝에 프로방스풍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동화 속 난장이들이 살았을 법한 독특한 외관이다. 동양의 해학적인 곡선과 서양의 스텐인드글라스가 물고기 모형으로 어우러진다.
어부들이 거친 바다로 나가기 전 기도하는 유럽의 ‘어부들의 기도소’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10번 유다 다대오의 집은 칭찬의 집이다.
소악도에서 노둣길을 지나 진섬에 뫼 산(山)자 모양의 뾰족지붕의 부드러운 곡선과 작고 푸른 창문이 여럿 있는 작은 예배당이 앙증맞다.
외부의 오리엔탈 타일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내부의 작은 창을 통해 보는 바다는 액자 속 그림이 된다.
11번 시몬의 집은 사랑의 집이다.
소악도 진섬이 보이는 솔숲의 개방된 공간 건축물이다. 문이 생략된 건축물을 통해 바다로 직접 나아가는 느낌이다. 해질 무렵 석양이 일품이다. 두터운 흰 석회벽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만화처럼 단순한 조형미가 압권이다. 모든 공간이 바다로 열려 있다.
울창한 해송을 배경으로 자리한 예배당은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모두 관통한다. 주변의 조경이 완성되면 완벽한 포토 포인트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마지막 12번 가롯 유다의 집은 지혜의 집이라 정했다.
가롯 유다의 집은 만조 때는 갈 수 없는 딴섬에 자리한 고딕양식의 예배당이다. 몽쉘미셀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뾰족지붕과 붉은 벽돌, 둥근 첨탑이 매력적이다. 순례길에 조릿대나무 숲길과 고운 모래사장도 만난다.
“땡 땡 땡” 벽돌을 나선형으로 돌려 쌓은 종탑의 종을 울리며 순례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일부러 물이 찰 때 들어가 아무도 없는 섬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자. 물이 빠지면 갯벌에서 파래와 고동줍기는 순례길의 보너스이다.
기점·소악도에 물이 들면 모든 순례자의 일상은 잠시 멈춘다. 노두길에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이어가고 쉬어 가길 반복하는 섬이 주는 특별함이 있다. 빠름과 편리함이 익숙한 우리들에게 섬은 자연스레 멈춤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 여행메모-
압해도 송공선착장, 지도읍 송도선착장 등에서 차도선이 운항한다. 송공항에서 대기점도까지 70분가량, 송도선착장에서 병풍도까지 25분 걸린다. 배 시간은 계절과 물때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소기점도에 마을기업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061-246-1245)와 민박집에서 숙식이 가능하다.
노두길이 잠기는 물 때 시간과 하절기 배편 등은 여행자센터(061-246-1245)에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드론촬영=왕보현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