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속 조상우(박해수)가 살았다면 이런 모습일까. 최근 화상으로 만난 배우 박해수는 극중 단체복이었던 초록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가슴팍엔 이름 대신 숫자 ‘218’이 새겨졌다. 박해수는 ‘오징어 게임’에서 생사 여정을 함께 한 이 초록 운동복을 개인 소장하기로 했다. “자주 입고 다닐 거예요. (촬영 당시의) 저를 잊지 않도록요. 게다가 이 옷, 착용감이 무척 좋습니다. 하하.”
상우는 운동복보단 양복에 더 익숙한 인물이다. 쌍문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서울대에 수석 입학해 동네의 자랑이 됐다. 졸업 후 증권회사에 취직해 성실하게 사는 줄 알았건만, 투자에 실패해 수억 원을 빚졌다. 제 돈으로도 모자라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노모의 집과 가게를 담보로 빚을 냈고, 심지어 고객이 맡긴 돈까지 빼돌렸다. 경찰에 쫓기고 빚더미에 깔린 상우는 벼랑 끝 신세였다. 번듯한 회색 양복이 죄수복처럼 그를 옥죄었다.
‘쌍문동 수재’는 어쩌다 이런 수렁에 빠졌을까. 박해수는 경쟁 사회에서 학습한 물질만능주의와 1등 제일주의가 상우를 망가뜨렸다고 봤다. “상우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한 인물이에요. 누군가를 밟아야 승리하고 성공한다고 믿었겠죠. 1등이 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박탈감을 상우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한때 경주마였던 상우는 죽기 아니면 이기기뿐인 게임장에서 괴물로 변해갔다. 그는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은 단지 어리석거나 무능력했을 뿐이라고. 남을 짓밟는 건 내가 살아남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그런 상우에게 ‘동네 형’ 성기훈(이정재)은 한심스럽기만 하다. “오지랖은 쓸데없이 넓은 게, 머리는 나빠서!” 마지막 게임을 앞둔 상우는 기훈에게 날을 세운다. 희미하던 양심과 도덕심은 열등감으로 뒤틀렸다. 상우가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하고 주변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훈에 자격지심을 느꼈다고 박해수는 분석했다. 외국인 노동자 알리(아누팜 트리파티)를 향한 태도도 묘하다. 연민일까, 혹은 상대적 우위에서 느끼는 안도감일까. 박해수는 “상우가 알리의 잘린 손가락을 지긋이 바라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불쌍히 여기는 것도 아니고, 혐오스러워하지도 않는 눈빛이었다”고 돌아봤다.
낯설 만큼 아름다고 거대한 ‘오징어 게임’의 세트장은 배우들을 연기에 더욱 몰입시켰다. 박해수는 “촬영장에 가면 외롭고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촬영장에서 소름이 돋기도 여러 번이었다. 극중 마지막 게임을 앞둔 세 사람이 텅 빈 숙소로 돌아왔을 때, 많은 피가 스며든 운동장에서 기훈을 마주하고 섰을 때가 그랬다. 몸도 고생이었다. “줄다리기하는 장면은 ‘죽었다’ 하고 찍었고요, 마지막 오징어 게임은 ‘죽는다’ 하면서 찍었습니다.(웃음) 빗속에서 오징어 게임 장면을 촬영할 땐, 이정재 선배님과 서로 따뜻한 물을 부어줬던 기억도 납니다.”
상우만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박해수 역시 골목으로 몰린 듯한 기분에 빠진 적이 있다. ‘오징어 게임’ 공개 직전, 그는 혼란에 빠졌다.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 공백이 있었어요.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의심이 많은 편인데, 관객의 피드백도 받지 못하니 힘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오징어 게임’은 더욱 각별하다. 박해수는 이 작품이 “생명같다”고 했다. 슬럼프를 떨친 그는 차기작 촬영으로 바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오는 30일 시작하는 OCN 드라마 ‘키마이라’로 안방극장을 다시 찾고,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수리남’(감독 윤종빈)과 ‘야차’(감독 나현)에도 출연한다.
“어렸을 땐 욕심이 많았어요. 멘털(정신)이 센 편도 아니라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죠. 그럴 땐 작품에서 위안을 받았어요. 제 캐릭터 혹은 상대 캐릭터에 저를 비춰 보면서 위로를 얻곤 했습니다. 상우를 통해서는 ‘내가 뭔가를 잊거나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묻게 됐어요. 바쁘고 일에 쫓기다 보면 시선이 좁아지기 마련이잖아요. 주변을 살피지 못하거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외면하기 쉬운데, 그러지 않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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