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느끼고 있어요.” 최근 화상으로 만난 정호연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런웨이를 누비며 패션모델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3월 ‘오징어 게임’ 오디션에 동영상으로 참여했다. 패션위크 무대를 준비하며 미국 뉴욕에 머무르던 때였다. 정호연은 ‘직접 만나고 싶다’는 황동혁 감독 요청에 미련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에게 주어진 배역은 새터민 새벽. 배우로 만나는 첫 캐릭터였다.
야합과 배신이 판을 치는 서바이벌 게임장에서 새벽은 외톨이 늑대 같은 인물이다. 부모는 북에 남았고, 함께 탈북한 어린 동생은 보육원에 맡겼다. 새벽의 꿈은 부모를 탈출시켜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것. 소매치기까지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던 새벽은 상금 456억 원이 걸린 게임에 기꺼이 발을 들인다. 정호연은 새벽의 서슬 퍼런 독기와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따뜻함을 봤다. 새터민 다큐멘터리들을 찾아보고 새벽 입장에서 일기를 쓰는 등 치밀하게 캐릭터를 분석한 결과였다.
“새벽이가 과거에 겪은 일들을 구체화해서 제 안에 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새벽이와 동생 철이(박시완)가 탈북하는 과정에서 엄마가 희생했다고 설정한 뒤, 엄마가 중국 공안에게 끌려가며 남긴 말 등을 상상하며 일기를 썼습니다. 새벽이가 가족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경험 때문이라고 봤어요.”
정호연은 촬영 전 설계한 캐릭터를 토대로 촬영장 분위기에 자신을 내던졌다. 서바이벌 게임에 임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새벽의 마음을 흐름에 맡기려고 했단다. “새벽이는 원래 가족을 위해 희생할 만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어요. 게임 도중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원래의 새벽이가 더 드러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동료들과의 호흡도 중요했다. 정호연은 “기훈(이정재) 아저씨나 지영(이유미)을 만나면서 새벽이가 어떻게 변하는지 많이 느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진한 감정을 공유한 지영 역의 배우 이유미와는 실제로도 ‘절친’이 됐다. 촬영 전부터 고민과 조언을 자주 나눈 덕분이었다. 지영과 새벽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찍을 땐 차오르는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었을 만큼 역할에 몰입했다. 정호연에게 ‘새벽과 지영이 어떻게 그리 깊은 우정을 나눴을 거라 생각하냐’고 묻자, 시종 생글대던 얼굴이 일순 진지해졌다. “옆 사람을 이겨야 내가 살 수 있는데도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그런 이상한 감정이 들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새벽과 지영은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은 사람들로서 공유하는 동질감이 있었을 거예요.”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 날을 세운 새벽에게서 정호연은 과거 자신을 봤다.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외로움, 약한 마음을 감추려 썼던 가면을 새벽에게서도 발견했다. “개인적인 성취가 중요”했던 자신과 달리, 가족에 헌신하는 새벽을 받아들이려 애를 쓰기도 했다. 정호연은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매력적이고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오징어 게임’ 공개 후, 모델 활동 당시 머물렀던 뉴욕 집도 처분했다. 연기에 매진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모델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집중해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고민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갈증이 있었죠. 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일이라 매력적이에요. 물론 연기에 도전하기까지 고민은 많았죠. 모델로 활동하면서도 일이 잘 될 때는 ‘왜 잘 될까’, 안 될 때는 ‘왜 안 될까’를 많이 생각했는데, 이유를 하나로 꼽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저 매 순간 내 일에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 지금 찾은 답은 그거 하나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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