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시를 닮고 시심은 가을로 향한다. 팬데믹의 잔혹함은 바람을 타고 무덤덤해지고 있으며 모두가 이른 추위에 움츠려 든 지금, 가을의 랩소디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노래가 있다. 가수 이동원의 ‘이별 노래’이다.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성탄절 캐럴처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이별 노래’는 시인 정호승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곡이다. 방탄소년단 노래만큼 대세는 아니지만 그 옛적, 모두가 분투했던 80년대의 정서를 녹여낸 명곡이라 평가해도 과하지 않을 듯싶다.
유난히 시인 정호승을 좋아한다. 그의 시에는 시간이 있고 사람이 있다. 거창한 서사보다는 정제된 서정으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아스라한 향기가 배어난다. 사는 것이 치열해질수록 정호승의 시는 위로가 되고 안식이 된다. 정제된 모든 언어는 어질고 착한 법이다. 시인의 시는 이를 입증한다.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나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려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떠나는 그대를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이 노을을 바탕으로 절절하게 그려진다. ‘그대 조금만 늦게 떠나준다면’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인생을 살며 누구나 가슴 저미는 이별이 떠올라 울컥 논물이 베어 나온다. 시인도 아스라한 경험에서 써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별은 초라하지 않다. 상대에 대한 성냄은 없고 애절함만 있을 뿐이다. 순하디 순한 이별이다.
서슬 퍼렇던 군부 독재 시절, 사람의 자유와 인권이 멀어져 가는 암울한 시대를 시인은 이별의 아픔으로 승화했을 것이다. 삶이 치열하면 현재를 딛고 다른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은 빈곤해진다. 누구도 예외 없다. 그러하기에 정치인들은 유혹에 약한 서민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수능란함을 가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정작 진정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러다 보니 정치와 민심은 따로 노는 경우가 많은 지도 모르겠다. 내년 두 번의 큰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은 저마다 경쟁하듯이 더 나은 미래를 시민들에게 달디 단 약속으로 속삭인다. 그러나 정호승의‘이별노래’속 사람과 감성과 여운은 없다. 분노를 부추기며 선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어느 정치인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런 정치인들과의 이별은 아프지 않다.
건강한 공론의 장으로서의 정치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하긴 역사 속에서 희망과 용기는 늘 시민의 몫이었다. 우리가 허황된 욕망과 공포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대로 상식대로 보편적 윤리 앞에 겸손한 사회였으면 좋겠다. 옷깃을 여미는 한기가 속절없이 다가왔지만 정호승의 ‘이별 노래’ 속, 사람의 집들에 온기는 결코 특정한 이익으로 현혹되어지는, 레토릭으로는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깊어 가는 가을, 농익은 시민의식으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바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별 노래’속, ‘떠나다’는 동일한 시어가 주는 반복의 미학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떠나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시대, 우리는 현재의 역사를 쓴다. 몹쓸 바이러스도 오만한 인류역사의 초고라는 건 상찬이다. 예정된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시간을 뛰어넘는 진리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다만 사람들이 함께 살아내는 것일 뿐이다. 우린 그 길을 꾸역꾸역 넘어가고 있다.
참으로 매서웠던 코로나19가 우리 곁을 떠나는 날, ‘이별 노래’, ‘사람의 집들’에 온기를 채워주는 날이었으면 참 좋겠다. 모든 시민들이 다시 회복될 일상을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