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천장을 뚫을 듯 박력 있게 터져 나오는 고음이 관객을 황홀경에 빠뜨렸다. 지난 21일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역을 맡은 배우 옥주현은 한 마디로 ‘명불허전’이었다. 그가 부른 이 작품 최고 인기곡인 ‘레베카’(긴 버전)는 벼락처럼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객석에선 박수갈채가 끊일 줄을 몰랐다.
‘레베카는 영국 소설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38년 출간한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로맨스와 서스펜스를 뒤섞은 이야기와 중독성 강한 넘버,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가 매력으로 꼽힌다. 200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레이문드 극장에서 처음 공연된 뒤 전 세계 12개국 관객을 만났으며, 한국에선 2013년 초연돼 여섯 시즌 째 이어지고 있다.
큰 줄기는 영국 맨덜리 저택 주인 막심과 결혼한 ‘나’가 저택 집사 댄버스와 갈등하는 과정을 따른다. 막심의 죽은 아내 레베카와 친밀한 관계였던 댄버스는 ‘나’를 증오하며 그를 곤경에 빠뜨린다. 가난했던 ‘나’는 고상하고 세련된 귀부인이었던 레베카를 따라 잡으려 애쓰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막심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강인하게 성장하며 댄버스에 맞선다.
명예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막심의 태도는 공감하기 어렵고, ‘나’와 레베카를 통해 구현하는 성녀와 악녀의 대립이 구시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댄버스가 뿜어내는 마력은 작품의 여러 약점을 단숨에 잊게 만들 만큼 강력하다. 레베카를 향한 광기 어린 집착, 이에 말미암은 사악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관객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옥주현은 레베카와 댄버스의 관계를 성애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둬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폭발적인 가창력은 물론, 큰 키와 꼿꼿한 자세, 중후한 중저음 음성으로 작품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레베카’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한 이장우는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준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남모를 불안함에 사로잡힌 막심의 이중적인 면모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격정적인 연기와 긴 호흡을 동시에 요구하는 대표곡 ‘칼날 같은 사랑’도 무리 없이 소화한다. 초연에서 잭 파벨을 연기했던 에녹은 이번 시즌에서 막심으로 변신하고, 민영기와 김준현도 같은 역할에 캐스팅됐다. 댄버스는 옥주현과 신영숙이 번갈아 연기한다. ‘나’ 역을 맡은 임혜영·박지연·이지혜는 ‘레베카’에 한 번 이상 출연한 ‘경력직’이다.정승호 무대 디자이너가 만든 세트는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만큼 존재감이 크다. 특히 ‘레베카’(긴 버전)에 등장하는 360° 회전 발코니가 압권이다. 맨덜리 저택 안 아늑한 침실과 저택 밖 아찔한 절벽이 교차하며 몰입감을 높인다. 무대 정면에 배치한 스크린은 극 중 ‘나’가 그리는 그림, 맨덜리 해변 등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공연은 2022년 2월27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