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월 19일, 데즈먼드 투투는 붉은 사제복을 입고 12만명의 분노한 청년들 앞에 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 소웨토의 축구경기장. 열흘 전 사망한 흑인 지도자 크리스 하니의 장례식이었다.
한국의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처럼, 백인의 총에 숨진 크리스 하니의 장례식에 분노한 시민들이 몰려왔다. 흑인 청년들은 100년이 넘은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울분을 터뜨리며 경찰차를 불태우고 정부 건물에 돌을 던졌다. 경찰은 총을 쏘았다. 흑인 거주지 소웨토에서만 6명이 숨지고 200명이 다쳤다.
장례식날에도 축구경기장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는 경찰의 헬기가 떠 있었다.
남아공은 넬슨 만델라가 27년만에 석방된 뒤 백인에게서 합법적으로 정권을 인수할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크리스 하니의 죽음으로 혼란이 커지면서 선거 연기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하니의 집 앞에서 Z-88 권총으로 3발의 총을 쏜 백인 나치주의자 야누스 왈루스는 훗날 자신의 범행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나라에 인종간 전쟁이 일어나 수백 수천명이 죽는 혼란에 빠트리면 치안 유지를 위해 백인 정부가 집권하리라 생각했다.”)
장례식 설교를 맡은 데즈먼드 투투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성공회 대주교였다. 기독교 국가이면서 백인정권이 흑인을 차별하는 나라인 남아공에서 그는 교회 안에서부터, 그리고 교회 밖까지 인종차별을 없애자는 목소리를 냈다. 최초의 흑인 성공회 대주교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예외를 인정 받았지만, 그는 모든 특혜를 포기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1984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가 과연 크리스 하니의 장례식에서 무슨 목소리를 낼지 모두가 주목했다. 그는 성경을 펴고 로마서 8장31절을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
“흑인과 백인, 우리 모두 하느님의 무지개 백성(the rainbow nation)입니다.”
평소에는 유머가 가득한 그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절규에 가까웠다.
“우리는 멈출 수 없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넘어 승리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총부리도, 무엇도 우리를 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흑인과 백인 모두가 인종차별 정책 아래에선 자유롭지 못하다는 그의 외침은, 흑인들 마음의 분노와 울분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눈에 보이는 백인을 쓰러트리는 일이 아니라, 백인과 흑인을 갈라놓은 저 오랜 차별과 억압을 깨트리고 자유를 얻는 일이 더 중요했다.
투투가 두 팔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흑인 청년들도 주먹을 치켜들었다. 투투는 외쳤다.
“우리에게 자유를! 우리 모두에게! 흑인도 백인도 함께!(We will be free! All of us! Black and white together!)”
이 날부터 무지개 나라라는 말은 새로운 남아공을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 흑인도 백인도 누구도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나라. 데즈먼드 투투는 무지개나라를 선언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나라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의 무기는 정치 권력도 사람들의 분노도 아니었다. 촛불과 기도, 그리고 웃음이었다.
무지개 나라를 외치고 만들어 낸 남아공의 영적 지도자
이듬해 넬슨 만델라의 흑인정부가 출범한 뒤, 투투는 진실과화해위원회(TRC)원장을 맡았다. TRC의 첫 모임에 투투는 촛불을 켰다.
“우리 위원회에는 흑인이 10명, 백인이 6명입니다. 혼혈과 인도인, 아프리카인이 있고 정치적으로는 좌파부터 백인 우파까지, 기독교인이 다수이지만 무슬림과 힌두교인,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도 있습니다. 7명이 법률가이고 성직자가 나를 포함해 4명입니다. 남성과 여성, 정신보건 전문의, 심리학자, 간호사도 있습니다. 각자가 걸어온 길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과 마음의 지도가 다릅니다.”
나직이 한숨을 쉰 투투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모임을 이렇게 시작합시다. 우리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마음을 배려합시다. 그러려면 우리의 감수성을 깨워야 하고 우리의 영혼이 타인을 향해 열려야 합니다. 첫날인 오늘 하루 우리의 영혼을 열어 놓는 시간을 가집시다. 눈을 감고 침묵합시다. 신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부르는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초월적인 영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마음으로 따라갑시다.”
고백, 용서, 화해와 무지개라는 종교적인 단어를 현실 정치에 심기 위한 실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TRC는 전국을 돌며 청문회를 열었고 대부분이 언론에 생중계되었다. 청문회마다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범죄를 고백하면 그 끔직함에 분노했고, 고백이 충분치 않으면 그 미지근함에 비난이 쏟아졌다. 피해자들의 절규는 남아공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격렬했다. 흑인들이 백인을 향해 저지른 범죄도 드러나자 백인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넬슨 만델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당시 남아공 국민이 겪은 정신적 충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인간성과 인격에 손상을 입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지지자와 반대자, 가해자와 피해자,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람들에게 심은 분열, 소외, 의심과 분노가 아파르트헤이트의 극복을 어렵게 했다. 투투는 그의 책 ‘용서 없이 미래 없다’에서 “TRC의 첫 1년은 지옥 같았다”고 했다.
“회의마다 가시 돋친 말이 난무했다. 빈정, 경멸, 섣부른 피해의식이 가득했다.”
인간성마저 말살한 인종차별에 맞서 진정한 회복 기도
비쇼대학살 청문회가 열렸을 때였다. 이 사건은 1992년 9월 비쇼라는 소도시에서 군이 흑인에게 총을 쏴 60명 가까이 사망한 사건이다. 군사령관과 책임자들은 청문회장에서도 경멸조로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방청석은 분노로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시 현장을 지휘한 장교 4명이 증언대에 앉았다. 1명은 백인, 3명은 흑인이었다. 백인 장교는 긴장한 목소리로 자신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군인 특유의 딱딱한, 그러나 진지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백인 장교가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것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디 나의 동료였던 이들은 여러분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들이 겪었던 엄청난 부담을 헤아려 주시겠습니까.”
방청석의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박수를 쳤다. 청중 사이로 박수와 탄성이 번져갔다. 투투는 침묵하면서 박수와 환호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모두 아실겁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고, 용서를 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 받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TRC는 1998년 5권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총 2만1290건의 피해가 접수됐고, 고백과 용서를 신청한 가해자는 7112명이었다. 이 중 사면을 받은 이들은 1200여명이었다. 청문회에서 나온 증언은 TRC 홈페이지(justice.gov.za/trc)에 기록돼 인류의 기록유산으로 남아있다.
TRC 임무를 마친 뒤 투투 대주교는 전세계를 다니며 인종과 종교, 차이를 넘어선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했다. 유튜브에서 데즈먼드 투투를 검색하면, 그가 남긴 육성을 접할 수 있다. 그는 유쾌한 사제였다. 목소리는 코미디언처럼 하이톤이고, 입끝은 항상 위로 향해 있다. 몸짓 손짓은 가볍고 경쾌했다. 크리스 허니의 장례식처럼 분노한 사람들 앞에서도 설교를 할 때도 그는 울분보다 소망을 이야기했다.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모순을 겪고 목격하고 싸우면서도 그는 인간을 향한 낙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강연과 대화는 늘 유머와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또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인간의 잔인함에 숨이 막힌다고 말하면서도, 선한 마음이 이뤄내는 변화를 항상 이야기하고 감동했다.
투투는 TRC 이후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흑인 정부를 향해 늘 매서운 비판을 쏟아냈다. 만델라의 뒤를 이은 타보 음베키 정권을 향해선 ‘소수의 흑인 엘리트만을 위한 정부’라고 혹평했고, 주마 정부를 향해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보다 더 나쁜 정부”라고 질타했다. 비록 인종차별정책은 사라졌지만, 흑인들 사이에 빈부격차는 더 커졌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비판이었다.
투투는 2021년 12월 26일, 성탄절을 막 지난 일요일 오전 케이프타운의 한 요양소에서 가족에 둘러싸인 채 숨을 멈췄다. 이 땅에서 보낸 세월은 90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과 학살이 벌어진 시기에 그는 화해와 용서, 웃음과 무지개 세상을 선물하고 떠났다.
김지방 쿠키뉴스 대표 fattykim@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