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그날, 우리 삶도 함께 붕괴됐습니다” ② 54번 버스 기사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③ 눈물 채 마르기도 전에...12명 더 세상을 떠났다 ④ “과태료 부과하면 되지” 공무원 안전불감증 |
2021년 6월9일은 광주 학동 붕괴사고가 일어난 날이다. 사고로 9명이 숨지고 8명은 크게 다쳤다. 누군가는 잊은 지 오래된 하루겠지만, 유족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날 이후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고현장 근처를 못 지나다니는 건 당연했으며, 많은 가족들이 여전히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 쿠키뉴스는 사고 피해자의 아들 이모씨를 만나 그날의 악몽과 계속되는 아픔을 들어봤다.
6월9일 오후 4시23분
이씨는 광주의 한 기자재 회사 직원이다. 매일 사무실과 납품처를 오가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이씨의 어머니는 가족을 돌보고 집안일을 살뜰히 챙기는 주부였다. 이들은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지극히 평범한 가족이었다. 6월9일도 그런 평범한 날들 중 하루였다.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오후 4시30분. 이씨는 학동에서 붕괴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재개발을 위해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이 무너지면서 그 앞을 지나던 54번 버스를 덮쳤다는 것. 이씨는 그저 큰 인명피해가 없기를 바랐다.
오후 6시. 어머니와 연락이 닿질 않으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행적을 수소문해 보니 마지막 행선지는 큰외삼촌 댁이었다. 큰외삼촌은 어머니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고 전했다. 이씨의 어머니가 탄 버스는 광주 학동의 54번 버스였다.
피해자 없는 사고 대책
정신을 차려보니 장례식장이었다. 이씨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유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자치단체 등이 사고대책반을 꾸려 유가족을 지원하고 있다는 소식이 뉴스에서 전해졌다. 그러나 정작 이씨를 비롯한 붕괴사고 피해 유가족들 어느 누구도 TF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사고 다음날인 10일이 되자 동구청 공무원들을 시작으로 정치인들이 장례식장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고 후 장례 절차나 방안 등을 이씨를 포함한 유가족들과 논의하기 시작했다. 매뉴얼은 없었다.
발인이 다가왔지만 진행할 수 없었다. 검찰이 부검을 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철거 중이던 건물이 무너져 목숨을 잃은 게 명백한데, 부검을 통해 사인을 찾으려 한다는 게 말도 안된다고 이씨는 생각했다.
그들은 ‘부검을 하지 않으면 재판에서 관련자들이 정확한 사망원인을 모른다는 것을 이유로 처벌을 피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부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검의에게 고인들이 제발 아프지 않도록 부검을 진행해달라며 울며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철저한 원인규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어머니를 비롯해 이들 모두가 대체 왜, 어떻게 죽게 됐는지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다 밝혀지길 바랍니다. 사고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벌을 받고요. 그래야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비슷한 사건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지 않을까요. 저희 가족들을 희생자라고 말한다는 게 정말 너무나도 싫지만, 저희에게 일어난 사고를 계기로 대한민국이 좀 더 진일보하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작은 추모 공간 바라지만
유가족들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사고현장을 못 지나가는 건 당연했다.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는 가족도 있다. 이씨는 사고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쉽게 잠에 못 든다. 술에 의지해서 겨우 잠들고 있다. 새벽에 깨기라도 하는 날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저희 모두 고인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 하나로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부끄러운 짓 하지 않으려고요. (유가족들끼리) 지금은 서로 다 가까워졌습니다. 그날 세상을 떠난 9명이 어딘가에서 다 같이 모여 있지 않을까요. 저희는 그분들이 엮어준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가족 대책위원회 대표로써 여러 행정적 업무도 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가족들을 한 데 모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분들이 저를 믿고 따라줬다는 게 제일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학동 재개발이 끝나면 붕괴사고 건물이 있던 곳을 놀이터로 이용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땅 소유주인 조합원들에게 애원 중이다.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다. 사고가 난 장소에 작게나마 추모 공간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희가 조합원들한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값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할 테니까 고인들의 이름이 들어간 나무만 심게 해 달라고. 일부 언론과 시민들은 ‘광주는 무조건 추모를 하려 한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너무나도 상처가 되는 말이죠. 하지만 그 자리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50년이 지나서 그 자리를 지날 때 그곳이 그냥 아파트 단지 내 한 쪽 벽이거나 벤치가 놓여있다면 참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추모 공간은 앞으로 저희 유가족들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입니다.”
광주 학동 붕괴사고는 명백한 인재였다. 정부는 2개월에 걸쳐 해당 사고를 조사해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는 △해체계획서와 규정을 무시한 공사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건설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하청과 재하청으로 이뤄진 철거 등을 참사 원인으로 꼽았다. 재개발 관련 각종 비리도 드러났다. 공사 수주업체와 브로커들 사이에 수억원대의 금품이 오갔고, 입찰담합 등 불법행위가 이뤄진 정황이 경찰 수사로 일부 드러났다. 철저한 원인규명과 관련자 처벌은 유가족만이 아닌, 우리 사회 모두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안세진 기자 asj0525@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