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름대며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 사내의 얼굴이 심술 맞다. 등은 굽었고, 비틀린 오른팔 아래로 쪼그라든 손이 덜렁댄다. 가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아버지(영화 ‘국제시장’),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며 재벌 3세에 맞서는 열혈 형사(영화 ‘베테랑’)는 온데간데없다. 배우 황정민이 무대에서 입은 인물은 곱사등이 왕. 그는 지난 11일 개막한 연극 ‘리차드 3세’에서 왕좌에 오르려 권모술수를 꾸미는 리차드 글로체스터로 변신했다.
작품은 장미전쟁이 벌어지던 15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랭커스터 왕조를 물리친 요크가는 기쁨에 취했지만, 리차드는 불만투성이다. 가문을 위해 전장에 몸을 내던졌으나 보람이 없어서다. 왕관은 큰형 에드워드 4세(윤서현) 차지.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그는 이죽댄다. “날 봐. 좋은 핏줄로 태어났지만 거칠게 만들어졌지. 아무렇게나 찍어낸 듯 뒤틀린 모습.” 광대가 된 양 그는 말한다. “나 리차드는 이 순간부터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세상을 속일 명연기로도 내가 저 왕좌를 차지할 수 없다면 조금 더, 더, 더 악해지면 되겠지.”
리차드는 소문을 무기 삼고 회유를 방패처럼 두른 채 거침없이 질주한다. 헛소문을 퍼뜨려 큰형과 작은 형 조지(이갑선)를 죽게 만들고 심복을 써 어린 두 조카마저 살해한다. 자신이 죽인 랭커스터 왕조 며느리 앤(임강희)을 아내로 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형수 엘리자베스(장영남)의 이부 딸에게도 눈독을 들인다. 도덕이나 윤리 따위, 우정과 인정마저도 그에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난 뒤틀린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듯,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신체 콤플렉스에서 비롯한 고립감은 리차드의 눈 먼 권력욕에 불을 붙였고, 뒤틀린 욕망은 그를 집어 삼켜 파멸로 이끈다.
악랄하고 교활한 리차드를 쉽게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은 황정민의 신들린 연기에서 나온다. 그는 리차드의 결핍을 강조해 연민을 이끌어내는 대신, 익살을 떨며 관객을 제 편에 세운다. 왕위 계승자인 조카를 보며 과장된 말투로 “이야~ 어린 꼬마가 빈틈이 없다”고 감탄해 관객을 웃기다가도, 이내 “꼬마가 너무 총명하면 오래 못 산다는 말이 있다”며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식이다. 유머 속에 묻어놓은 악의가 드러나는 순간 웃음은 서늘한 공포로 바뀐다. 셰익스피어가 쓴 시적인 대사를 구어처럼 입에 붙여 노래처럼 읊는 솜씨도 일품이다. 황정민은 하루 중 절반 가까이를 공연 연습에 쏟으며 리차드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는 4년 전 초연 당시에도 주인공을 맡아 객석 점유율을 98%까지 높였다.
500년 전 쓰인 이 이야기의 힘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작품은 요크가의 손에 가족을 잃은 마가렛 왕비(정은혜)의 입을 빌려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모르는가” 묻는다. 관찰자였던 관객은 당사자가 돼 스스로를 돌아본다. 자신이 일그러진 욕망을 인간성에 앞세우지 않았는지, 구석에 웅크린 자를 그림자처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공연은 다음달 13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