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내외 경영환경 악화로 우리 경제가 어려움에 처했다. 실업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비교해 감소했지만 여전히 청년들에게 일자리 구하기는 어렵다. 기업들도 경제환경 악화에 실적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 나라 경제를 이끈 기업인들의 젊은 날을 어땠을까. 이들은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조명해 본다. [편집자]
신춘호는 고등학생 때부터 장사를 했다. 맏형 신격호(롯데그룹 창업주)가 일본 유학 중인 탓도 있고 둘째 형은 건강이 좋지 않아 생계는 신춘호의 몫이어야만 했다.
한국전쟁으로 의용 경찰로 군 복무를 마친 신춘호는 1953년 23살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4년 후인 1957년 동아대학교에 입학한 신춘호는 가을에 사들인 쌀을 이듬해 봄에 파는 장사를 처음 시도했으나 쌀 품질이 변질하는 등 낭패를 본다. 그 후로 신춘호는 식품 가격보다 질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춘호가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더라도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 것을 강조한데는 이때 깨달은 품질관리의 중요성이 깊게 베어 있어서다. 1990년 신춘호는 신라면 수출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농심 브랜드를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 얼큰한 맛을 순화시키지도 말고 포장 디자인도 바꾸지 말자. 최고의 품질인 만큼 프리미엄의 이미지를 확보하자. 한국의 맛을 온전히 세계에 전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신춘호는 맏형 신격호의 부름을 받고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부산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에서 장사 하던 신춘호를 기업인으로 만든 건 어쩌면 신격호의 영향이 컸다. 만일 신격호가 일본에서 시작한 풍선껌 사업이 안됐거나, 일본 유학시절 문학을 수학한 그가 학문을 선택했다면 신춘호의 삶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신격호의 성공은 신춘호에겐 기회였을 지도 모른다.
1959년 신춘호는 신격호를 도와 사업을 시작했다. 그게 지금의 롯데다. 시장에서 품질관리의 중요성을 안 신춘호는 외형 확장에 중심을 둔 둘째 형 신철호와 달리 제품 품질을 중심에 뒀다. 당시는 한국전쟁의 가시지 않은 상처와 군사정권 등 정국이 어수선했고 경영전략이란 개념이 생소한 때 신춘호의 품질 경영 판단은 기업가로서의 역량을 보인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신춘호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이뤄지는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러고는 신격호에게 라면 사업 진출의 뜻을 밝혔으나 돌아온 답변은 "라면 사업을 왜 하느냐"였다. 이 한마디는 ‘신격호·신춘호’ 두 형제 사이를 갈라놓는 두꺼운 장벽이 된다. 두 형제는 이승에서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고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범국가적인 혼분식 장려 운동도 있으니 사업전망도 밝다." 신춘호가 라면사업에 뛰어들면서 한 말이다.
1963년 신격호와 갈등을 빚은 신춘호는 독립해 롯데 공업을 세우고 당시 국내 라면 시장을 거머쥐고 있던 삼양식품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때 나온 제품이 ‘롯데라면’이다. 하지만 사업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품질관리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긴 신춘호에게 5일간이라는 영업정지 처분이 내린 적 있다. 1968년 서울시는 제조업시설이 불결하고 제조공장의 불법 구조 변경을 이유로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었다.
신춘호가 1968년 출시한 라면 '왈순마'는 당시 베트남 군수물자로 수출되기도 했다. 신춘호는 왈순마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당시 돈으로 750만원 상당의 경품을 걸고 홍보 행사를 했을 정도였다. 68년 당시 최고 인기직업이었던 은행원의 첫 월급이 3~4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15년치 이상 월급과 맘먹는 어마한 돈이었다.
그러나 1969년 만화가 정운경씨가 신춘호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낸다. 만화가 정씨는 ‘왈순아지매’라는 만화를 그려왔는데, 롯데공업이 라면 상표로 왈순아지매의 모작인 ‘왈순마’를 사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게 이유였다. 왈순마는 삼양라면에 대적할 대마였던 점에서 신춘호에게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신격호는 신춘호가 롯데라는 상호를 쓰는 것마저 눈엣가시였는지 신춘호에게 롯데 상호를 쓰지 말라고 항의한다. 그래서 신춘호는 1978년 상호를 롯데 공업에서 ‘농심’으로 바꾼다.
농심으로 사명을 바꾼 신춘호는 4.5톤 트럭 80여 대 물량의 밀가루를 사용해 새우깡을 개발한다. 새우깡은 신춘호가 제품 이름을 놓고 고민하던 때 막내 딸 신윤경이 아리랑을 아리깡으로 잘못 발음한데서 착안해 지은 이름이다. 새우깡은 제품 출시와 함께 날개 단 듯 팔려나갔다. 바나나킥, 꿀꽈배기, 포테토칩 등 이후에 출시된 제품들도 연달아 히트를 친다.
“저의 성(姓)을 이용해 라면을 팔아보자는 게 아니다.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신(辛)‘으로 하자는 것이다.”
신라면의 출시는 국내라면 지형을 단숨에 바꿔버리는 센세이널(sensational)한 대 사건이자 부동의 1위 삼양라면을 제치는 승리였다. 신라면은 신춘호가 본인의 성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신라면의 성공에는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다. 신라면이 출시된 1986년은 ‘86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린 해다. 그때 전두환 정권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아시안게임을 개최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선전 효과를 위해서는 세계에 한국인의 매운맛을 보여주자고 독려했고, 매운맛 열풍이 불게 된다. 신라면도 이런 열풍에 힘입어 단숨에 국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국민 라면으로 올랐고 세계시장을 향해 뻗어나가는 중이다. 농심에 따르면 신라면은 미국시장에서 일본라면보다 대부분 3~4배 비싸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유통채널은 물론 주요 정부시설에 라면최초로 입점돼 판매되고 있다.
"50여 년간 강조해온 품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짚으면서,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에 그치지 말고 체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세계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야 한다."
지난해 3월 27일 영면에 든 신춘호가 마지막으로 한 업무지시다. '품질 제일'은 고등학생 때부터 농심 회장까지 신춘호가 경영철학으로 삼는 ‘제1의 원칙’이다. 그의 퇴장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시킨 ‘불굴의 청년기업인’ 퇴장을 의미한다.
윤은식 기자 eunsik8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