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끈덕지고 옹골져서 입에 달라붙는 어감도 징글맞다. 코로나가 그렇다. 몇 해의 시간 동안 인류의 일상에 찰싹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거머리 같은 이놈은 양수리 두물머리의 물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잦아듬을 반복한다. 질기고 질긴 사투는 잠시 소강상태이다. 넘쳐나던 검진자로 북적이던 병원에도 사람들의 불안했던 잔상만이 짙게 배었다. 그렇게 여름은 오고 바람의 결은 바뀌어갔다.
무더워지는 여름이 오려니 요란한 비가 이어지는 날들도 많아진다. 문명의 이기인 제습기로도 채 해결되지 않는 습기는 또다시 우리의 삶을 온통 축축하게 할 것이다. 코로나로 마모된 우리의 일상은 마스크 너머 불안한 눈빛으로 지난여름의 경고를 되새긴다. 지극히 당연한 소망이지만 우리 모두가 감당할 수 있는 여름이기를.
세상천지가 전염병에 몸서리치며 얼굴을 꽁꽁 감싼 마스크로 사람들을 멀리할 때, 내 생애 가장 낯설고 끔찍했던 지난해의 여름은 그나마 희망으로 버티어낼 수 있었다. 여름 바람이 자연의 차와 같듯이, 모든 것은 끝이 있듯이, 코로나의 경고장이 쌓일수록 익숙하고 평화로웠던 평범한 일상으로의 회귀도 기어코 올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지난겨울 한 줌 햇살에 해맑은 아이처럼 웃던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심장에 바늘이 돋는 것처럼 아팠던 시간이 지나간다. 언제나 그렇듯 화려함과 요란스러움으로 북적이는 봄을 뒤로하고 이제는 기척 없이 찾아오는 무더위에 속절없는 시간을 맞이한다. 그렇게 다시 여름은 왔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여물어 가던 여느 해와는 다른 여름을 맞는다.
출근길 병원 인근 아파트 베란다, 여러 스티로폼 박스에서 고추와 가지가 주렁주렁 열렸다. 생명을 담고 있는 열매는 회색빛 콘크리트 숲속에서도 강하고 숭고하다. 채소들의 호흡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분별없는 코로나의 침투력도 차마 어쩌지 못하는 살아 있음의 의연함이다. 필경 아파트 베란다 농부의 이 여름은 삶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강남 한복판에서 마주한 소박한 텃밭의 위용에 감탄하다 위태하게 제 몸을 지탱하고 있는 화분 속 콩잎과 마주한다. 남실바람에 보풀처럼 나풀거리며 밝은 햇살을 청하는 콩잎의 모양에 한동안 넋을 잃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스티로폼 박스엔 무성하게 자란 호박 넝쿨도 뻗어나갈 힘을 얻기 위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햇볕을 만끽한다. 이 모든 것들이 오묘하고 경이롭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낭만 여름이다.
시부저기 더울라 치면 거리낌 없이 사방 창문을 열어 놓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낮 오수를 깨우던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창문을 훌쩍 넘어 들이 찬다. 그 속에는 바람의 노래도 실려 있다. 풍경이라도 울리면 천상의 하모니로 편곡된다. 자연의 소리는 여운도 길다. 여름의 소리는 더더욱 가느다란 모습으로 꼬리를 물고 사라지면서 이내 고요 속으로 존재를 이끈다. 아, 그때의 여름은 의사로서의 진료과목인 이비인후가 제대로 청량하고 건강했다.
여름 속 근간에는 병원을 나설 때마다 어김없는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빌딩 숲 사이사이를 돌고 돌아 모여 있던 바람은 이윽고 건물을 나서는 좁은 통로 쪽으로 한꺼번에 몰려온다. 건조한 바람이다. 코로나로 고갈된 감정은 나무속 물기와 같다. 그러나 물기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에 더욱 생생하게 물기를 띤 존재로 살아난다. 돌아가고픈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같다. 그럴 때면 나는 희망과 일체화된다. 일상 회복, 모두가 건강함의 비단실에 휘감겨 건조한 바람에 실려 갈 것이다.
더위는 마스크 내 호흡을 막아선다. 여름이 고달픈 이유이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좋을 것에 이미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숨은 거칠다. 삶도 거칠다. 그렇게 우리의 여름은 코로나의 위험으로부터 삶의 진액이 되어 끈적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당연시 되어서는 안 될 여름밤의 음흉한 어둠은 지나가고 초롱초롱한 여름별의 시간은 올 것이다. 우리가 굳게 믿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