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귀 아래로 기이하게 찢어진 입을 가진 남자. 그를 본 사람들은 질겁하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남자의 기괴한 미소는 잔혹한 시대의 표상이다. 배경은 왕이 신과 같은 권력을 가졌던 17세기 영국. 탐욕과 향락에 중독된 귀족들 사이에선 ‘애완용 기형아’가 유행하던 때. 남자도 귀족들의 장난감이 될 운명이었다. 어린 시절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당해 입을 찢겼다. 지난달 10일 개막한 뮤지컬 ‘웃는 남자’의 주인공, 그윈플렌이다.
천한 신분과 추한 외모를 가진 그윈플렌은 사람들에게 괴물로 불린다. 어떤 이는 그를 괴물이라며 멸시하고, 어떤 이는 괴물인 그가 아름답다며 욕망한다. 그러나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웃는 남자’는 그윈플렌의 입을 빌려 묻는다. 작품은 도덕을 잃은 귀족과 존엄을 짓밟힌 하층민을 대비해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한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유명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노래를 지었고 로버트 요한슨이 극작과 연출을 맡았다.
그윈플렌은 비극적인 인물이다. 얼굴에 광대 웃음이 새겨진 채로 버려진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데아, 곰 같은 우르수스와 가족을 이룬다. 이들 모두 변방으로 밀려난 아웃사이더다. 거리를 떠돌며 광대로 살던 그윈플렌은 여공작 조시아나 눈에 들고, 출생에 얽힌 비밀까지 밝혀지며 삶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뒤에도 가장 낮은 곳의 존재들을 잊지 않는다. 도덕과 양심을 잃고 타락한 귀족들에게 눈을 바로 떠 세상을 보라고 호소한다.
초연부터 이번 삼연까지 빠짐없이 ‘웃는 남자’에 출연한 배우 박강현은 교과서 같은 그윈플렌을 보여준다. 처음 찢어진 입을 드러낼 때 얼굴에 건 어릿광대 같은 미소 뒤로 귀족을 면전에서 비꼴 수 있는 굳은 심지가 엿보인다. 거리의 철학자 우르수스에게 반골 DNA를 물려받은 그는 신념과 정의 앞에 당당하다. 곧고 깨끗하게 뻗어나가는 박강현의 음성은 굳세고 정직한 그윈플렌의 성격을 보강한다.
이런 면모는 ‘웃는 남자’의 대표곡인 ‘그 눈을 떠’에서 도드라진다. 부와 권력, 쾌락에 도취된 귀족들을 향해 “여러분은 약자들을 잊고 있다”고 지적하는 박강현에겐 한 줌 망설임이 없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부르는 ‘그 눈을 떠’는 “언젠가 진실한 사회가 찾아올 것”이라던 원작 소설 속 그윈플렌의 연설을 떠올리게 한다. 신분 상승 후 자의식이 희미해져 매력이 반감된 뮤지컬 버전 그윈플렌의 약점을, 박강현은 당당하고 카리스마 있는 노래로 상쇄한다.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노래해 ‘뮤지컬계 시몬스’라고 불리는 그의 장점은 넘버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한 ‘웃는 남자’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EMK뮤지컬컴퍼니가 175억원을 들여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 거대한 자본이 들어간 만큼 볼거리가 확실하다. 귀족이 사는 궁전은 화려함의 극치다. 반면 가난한 자들의 세상은 거칠고 누덕누덕한 질감으로 표현됐다. 덕분에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메시지가 직관적으로 와 닿는다. 교수형에 처해진 남자, 철가면 쓴 아이 등 원작 속 디테일들도 무대 곳곳에 녹아 있다.
다만 자신을 톰 짐 잭이라고 소개한 사내에게 우르수스가 “왜 이름이 세 개냐. 아빠가 ‘결정 장애’냐”라고 농담하는 대목은 보기 불편하다. 장애를 열등한 상태로 전제하는 차별적 표현이라서다. 평등과 인간 존엄을 역설하는 작품 주제 의식에 엇나가는 대사라 다른 표현으로 고칠 필요가 있겠다. 작품은 오는 8월22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