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진, 매진, 또 매진…. 여러 대형 뮤지컬이 맞붙은 여름 극장가에서 ‘전회 전석 매진’ 신화를 이뤄낸 이가 있다. 가수 겸 뮤지컬 배우 박효신이다. 그가 주인공 그윈플렌을 연기한 뮤지컬 ‘웃는 남자’가 74일 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내린다.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에 따르면 이번 시즌 36회 공연을 소화한 박효신은 3000석 규모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매회 매진시키며 10만여 관객을 홀렸다.
‘웃는 남자’는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동명 소설을 뮤지컬로 옮긴 작품이다. 공화정이 물러나고 왕권이 강해진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신 매매단 콤프라치코스의 손에 얼굴을 훼손당한 그윈플렌을 통해 평등과 인간 존엄을 역설한다. 작품은 2018년 초연 당시 4개 주요 뮤지컬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휩쓸었다. 한국 뮤지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효신은 이 작품으로 예그린뮤지컬어워즈와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원작은 시종 비장하다. 위고는 야인 우르수스를 통해 쾌락에 눈 먼 귀족을 풍자한다. 그윈플렌의 입을 빌려서는 “모든 것이 위에서 짓누르도록 되어 있으니, 이 사회는 실패한 건축물”이라며 계급 사회를 직격한다. 반면 뮤지컬 ‘웃는 남자’는 통속극에 가깝다. 그윈플렌이 겪는 시련과 상실에 집중해서다. 박효신은 뮤지컬의 이런 특성을 매력으로 승화시킨다. 섬세한 감정표현과 신들린 가창력으로 관객이 그윈플렌을 연민하도록, 우러러보도록, 마침내 사랑하도록 만든다.
박효신표 그윈플렌의 가장 큰 매력은 감정의 층위를 풍성하게 표현해 관객을 몰입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운명으로 인한 결핍과 영혼에 새겨진 허기, 가족이자 연인인 데아와의 사랑, 조시아나 여공작 등 귀족과 계급사회를 향한 냉소와 반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결기, 선의를 향한 믿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의 울분 등 그윈플렌이 경유한 감정을 목소리와 눈빛으로 겹겹이 쌓는다. 덕분에 관객은 그윈플렌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감정을 깊숙이 체험한다.
이런 박효신을 두고 ‘웃는 남자’의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은 “아름다움, 힘, 열정, 가사를 해석하는 능력을 모두 지녔다. 유일무이하다”고 평했다. 이 작품을 연출한 로버트 요한슨은 초연 당시 “박효신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효신의 명성은 바다 건너 해외에까지 전해졌다.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를 오가며 활동했던 필리핀 출신 가수 겸 배우 레아 살롱가는 SNS에 ‘웃는 남자’ 초연 당시 박효신의 커튼콜 영상을 공유하며 “차원이 다르다. 너무 놀랍다”고 썼다.
그냥 나온 찬사가 아니다. 연이은 호평 뒤엔 타고난 재능뿐 아니라 치열한 노력이 있다. 가요계에서 완벽주의자로 통하는 박효신은 뮤지컬 업계에서도 연습 벌레로 소문이 자자하다. 같은 작품에 출연한 동료 배우들 사이에서 “공연마다 그 누구보다 일찍 와서 준비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멋진 사람”(정선아), “인터미션(공연 중 쉬는 시간) 때도 쉬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끊임없이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이수빈)라는 후일담이 나올 정도다.
2000년 ‘락햄릿’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한 박효신은 2013년부터 ‘엘리자벳’ ‘모차르트!’ 등에 출연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흥행성이 보장된 재연작에 머무르는 대신, 한국형 캐릭터를 완성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팬텀’ ‘웃는 남자’ 등 초연작에 도전하며 매 작품 진화했다. 한 공연 업계 관계자는 “한 작품이 3000석 규모 극장을 30번 넘게 매진시킨 사례는 많지 않다. 박효신의 티켓 파워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면서 “4년간의 작품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뮤지컬계에서 박효신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