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은 제국주의가 저물어가던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자유를 갈망하던 황후 엘리자벳의 일대기를 그린다. 신부수업보다 말 타기를 더 좋아하는 천방지축 소녀 엘리자벳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눈에 띄어 그와 결혼한다. 하지만 신혼은 사랑만큼 달콤하지 않다. 사람들은 부부의 은밀한 사생활을 마구 씹어대고, 시어머니 소피는 자유분방한 엘리자벳이 못마땅해 한다. 손과 발은 물론 영혼까지 묶인 결혼 생활 때문에 엘리자벳은 괴롭다. 죽음은 이런 엘리자벳 곁을 맴돌며 자신만이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다고 유혹한다.
1992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된 ‘엘리자벳’은 30년 동안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스웨덴, 일본 등 7개 언어로 공연되며 1100만명 넘는 관객을 만났다. 한국에선 EMK뮤지컬컴퍼니가 논레플리카(재창작) 형식으로 제작했다. 초연 당시 뮤지컬 시상식에서 남녀주연상을 비롯한 주요 부문을 휩쓸 만큼 인기였다. 이중 회전무대, 리프트 3개, 11m 브릿지 등으로 완성한 웅장한 무대와 화려한 의상,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 작곡가 실베스타 르베이 손끝에서 탄생한 중독성 강한 음악이 어우러진 덕분이다.
다만 올해는 개막 전 여론이 나빴다. 초연 때부터 ‘엘리자벳’에 개근한 배우 옥주현이 주요 배우 캐스팅해 관여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제작사 측은 “엄격한 오디션과 원작사 승인을 거쳐 캐스팅했다”고 해명했지만, 졸지에 낙하산으로 찍힌 뉴 캐스트들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역대 한국 캐스트 가운데 최연소 엘리자벳 중 한 명인 이지혜와 뮤지컬에 처음 도전하는 성악가 길병민을 향한 반감이 컸다. 이지혜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중·노년 엘리자벳과 어울리지 않아서, 길병민은 극중 아들인 황태자 루돌프 역 배우보다 나이가 어려서 우려를 샀다.
지난 2일 본 ‘졔엘리’(이지혜 엘리자벳)는 해맑고 자유분방한 청년기와 삶에 짓눌려 공허해진 중년기를 안정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결혼 직후 사람들의 시선과 황실 규칙에 속박된 엘리자벳의 답답한 심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같은 배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옥주현이 공연 후반부에서 진가를 발휘한다면, 이지혜는 2막보다 1막에서 더 호소력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일찍이 베이스 바리톤 성악가로 명성을 떨친 길병민은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로 어린 나이로 인한 핸디캡을 떨쳐냈다. 7년 만에 ‘엘리자벳’으로 돌아온 신성록은 근사한 외모와 단단한 목소리로 고전미가 돋보이는 죽음을 완성했다. 김준수, 이해준이 신성록과 번갈아 죽음을 연기한다.
흔히 10주년 기념 공연이 역대 캐스트를 두루 데려와 자축하는 것과 달리, ‘엘리자벳’은 주요 배우 18명 중 12명을 새 얼굴로 채웠다. 이번 공연이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기보다 향후 새롭게 펼칠 ‘엘리자벳’을 준비하는 자리로 느껴지는 이유다. 이 같은 도전은 10년 동안 6개 시즌을 거치며 쌓은 노하우와 탄탄한 프로덕션 덕분에 가능했다. ‘엘리자벳’ 한국 프로덕션 연출을 맡은 로버트 요한슨은 “10년 동안 많은 분들의 영혼으로 이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했다”며 “앞으로도 ‘엘리자벳’이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11월13일까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