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생 김지영은 참는 데 익숙하다. 참도록 학습됐다. 학창시절 학교 앞에서 ‘바바리맨’을 마주쳤을 때, 불공정에 항의하던 여자 선배들이 오히려 “드센 X”이라고 비난 받았을 때, 취업 면접 자리에서 성희롱 질문을 받았을 때, 회식자리에서 거래처 직원이 치근덕댔을 때, 모르는 사람에게 “맘충” 소리를 들었을 때조차 그는 분노를 목구멍 뒤로 삼켰다. 목소리를 잃은 김지영을 사회는 손쉽게 지워냈다. 이달 초 개막한 연극 ‘82년생 김지영’은 이런 김지영이 자기 존재를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남주 작가가 쓴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원작은 2016년 출간된 후 한국에서만 138만 부 넘게 팔렸고, 미국과 일본 등 31개 국가에 수출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구조적 차별에 짓눌려온 여성들로부터 폭발적인 공감을 얻은 결과다. 2019년에는 원작 소설을 각색한 동명 영화가 개봉해 367만 관객을 만났다.
출산 이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지내던 김지영이 엄마에게 빙의된 듯한 이상증세를 보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은 김지영 남편 정대현의 입을 빌려 김지영의 삶을 훑는다. 삼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한 뒤 아이를 낳아 전업주부로 사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삶. 하지만 그 속에서 김지영은 크고 작은 차별에 시달리며 자신을 잃는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다시 한 번 살려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근 서울 삼성동 백암아트홀에서 만난 안경모 연출은 “20대 초반인 조카가 소설 ‘82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이 자기 미래일 것 같다며 울었다”며 “우리 사회가 달라지길, 김지영이 그 아이의 미래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간 연극을 통해 성폭력(X라는 아이에 대한 임상학적 보고서), 노동(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 장애(브레이크) 등 사회 문제를 건드렸던 안 연출은 “여성이 겪는 부당함과 불공정을 다루지만,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며 “‘82년생 김지영’이 자기 정체성을 잃은 모든 현대인의 이야기로 확장하길 바랐다”고 작품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주인공 김지영은 배우 소유진, 임혜영, 김란주가 번갈아 연기한다. 세 배우 중 유일하게 결혼과 출산 경험이 있는 소유진은 “순간순간마다 (김지영에게) 공감했다”고 털어놨다. “당시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상처였던 일들이 있잖아요. ‘나도 그 때 아무 말 못했는데…’ 하며 떠올리는 기억들이 있어요. 게다가 내게 상처 준 그 사람이 나쁜 것도, 그에게 악의가 있던 것도 아냐. 그런 일이 작품에서 계속 벌어져요.” 소유진의 말처럼 김지영이 겪는 무력이란 고통은 특별히 악한 개인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기처럼 존재하는 가부장적 관습이 그를 점점 질식하게 만든다.
원작 소설이 취재와 통계를 인용해 르포 같은 느낌을 준다면, 연극 ‘82년생 김지영’은 ‘나’를 잃어버렸던 김지영의 자아 회복기에 가깝다. 김지영이 자기 이름을 되찾고 “나한텐 내가 있어”라고 독백하는 장면에선 코끝이 찡해진다. 조남주 작가는 비릿하고 씁쓸하게 소설을 마무리했지만, 연극은 감정적이고 희망차다. 안 연출은 “사회활동이 제한되며 고립됐던 김지영이 자신을 발견하는 결말”이라며 “(‘82년생 김지영’이) 정체성을 잃은 모든 현대인들의 이야기로 확장하길 바란다”고 했다. 원작 소설과 영화를 향한 ‘평점 테러’ 등 비난에는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 이런 보편적인 이야기가 왜 논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며 “논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11월13일까지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