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의 제목으로 연초에 책을 출간하였다. 소소하게 꾸준히 읽히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인문학이 부박한 풍토에서 의사의 시선으로 인문학을 운운한다는 것이 자칫 설익은 오만으로 비칠까 노심초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단한 의료현실 속에서도 사람의 학문인 인문학을 꺼내드는 용기는 동료들에게도 환자들에게도 미약하나마 희망과 공감에 대한 손길을 건네는 것이기에 용기를 냈던 것이다. 의사로서의 생존의 위기 속에 고군분투하는 동료들에 대한 위로는 덤이다.
전국 40개 의과대학 홈페이지에는 각 대학이 지향하는 의료 교육의 목표가 게시되어 있다. 저마다의 특성이 있겠지만 '좋은 의사'와 '사회가 바라는 의사' 라는 양성 방향은 예외 없다. 인간의 조직에서 현실에 기반 한 실존적 가치를 드러낸 선언이 어디 있겠냐만 의료현실과는 사뭇 동떨어진 비현실적 레토릭 이란 생각은 지울 길 없다. ‘좋은 의사’, ‘사회가 바라는 의사’가 되기 위한 환경은 난공불락의 의료정책의 풍토 속에 물젖은 솜 마냥 무겁고 축축하기 때문이다.
의사로서의 '행복'은 휘황찬란한 '외적 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 가치'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산다. 의사는 의학 지식 못지않게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행복한 삶을 위한 정신적 가치를 키워야 한다고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의과대학에서의 의사로서의 희망은 의료현장에 투입되는 순간 소멸돼 가기 마련이다.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도 크다. 고단한 업무는 물론이려니와 갖가지 외적 리스크로 인해 의사로서의 삶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결코 과하지 않을 고백이다.
비인기 과로의 지원자가 날로 줄어드는 의과대학의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내 주요 수련 병원들의 전공의 모집 결과에서 유난히 저조한 지원율을 보이는 과들은 공통적으로 흉부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가정의학과 등이다. 모든 과가 소중한 환자의 생사를 책임지지만 특히 이 과들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전공들이다. 그러나 사람을 살릴수록 그 가치가 빛나는 전공임에도 날로 지원자가 줄어드는 현상은 한국의 의료현실을 대변한다. 최선의 노력에도 끝내 환자를 살리지 못해 받아야 하는 유가족들의 원망, 의료 소송은 물론이려니와 험난한 전공의 수련기간 동안 주 100시간 이상을 일해야 하는 고된 업무 강도가 주된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유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내면에서 떠오르는 원초적 감정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짐짓 허물하는 체했지만, 의리 번쩍 한 세속적 삶의 성취가 어찌 됐든,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다면, 비인기과의 의사는 참으로 할 만한 노릇이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고약스럽다.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숭고함과 희생만 강요해선 안 될 사회적 문제이다.
인문학은 더 비싼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는 게 아니라, 인간은 상품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깊이 천착한다. 인문학이 주는 진실 된 위로이다. 그러하기에 속칭‘CEO 인문학’이니‘인문학으로 광고하기’니 하는 표현은 형용모순이다. 사람이 없는 인문학이 지천에 널려있는 소비 없는 현실 속에서도 의과대학에서의 인문학은 그래서 더없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 각 의과대학들이 질병을 의학적 지식으로만 접근하는 게 아닌, 환자를, 사람을, 인간을, 질병의 숙주가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 이해하려는 인간적 접근법을 부단하게 시도하고 있으니 고무적인 일이다. 언제고 의사와 교감을 원하는 환자가 있기에 의사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되는 마땅한 이유이다.
열린 사회는 적절히 분화되어야 한다. 5천만 명이 다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제 방식대로 삶을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이다. 하물며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의 전공도 더더욱 분화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과로의 유인을 위해 적절한 처우 개선이 국가차원에서 이뤄져야 점진적으로 인력을 보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몫은 온전히 정부에게 있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소시민들에게 군인정신처럼 강제하는“하면 된다”라는 공통의 신념이 흔들리고 있는 무한 경쟁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묻는다. 의사이기에“하면 된다”가 아닌, “해야 된다”가 아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의료정책의 공정이다. 의사로서의 직업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 그 근간은 온전히 의료정책의 전환에 있다. 담론은 있지만 각론은 부족한 건강보험 재정과는 별도의 재원을 통해 비인기 전공으로의 의사인력을 충원하는 사회적 방안을 더 늦기 전에 논의해 보자. 의대에서의 인문학이 의료현장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