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에는 미뤄뒀던 대학 졸업을 위해 마지막 학기를 다녔다. 오랜만에 방문한 캠퍼스에선 ‘비건 학식’이 등장해 있었다. 매일 제공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등장만으로도 반가운 변화였다. 총학생회에서 주도한 시범사업이라고 했다.
내가 채식을 시작한 건 열다섯 살 즈음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벚꽃이 피어나던 어느 봄날이었는데, 나는 문득 고기라는 것이 ‘동물의 살’이라는 생각에 골똘히 파묻혔다. 고기가 당연히 동물의 살인데 그간 몰랐냐고 묻는다면, 사실 이전에는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더랬다.
“내가 먹는 고기가 정말로, 죽기 전엔 핏줄에서 피가 돌고 근육이 살아 움직이던 그런 생명체의 살이란 말이야?” 그런 방식으로 고기를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생경했다. 그래서 고기가 되는 동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죽는지를 찾아보게 됐다. 그 현실은 알다시피 매우 비참한 것이어서, 나는 결국 고기를 먹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채식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훨씬 나아졌다. 지역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사회적 인식의 측면에서부터 식품 구매에서의 선택권까지 변화된 양상이 고무적이다. 예를 들면, 십 년 전쯤만 하더라도 채식 식당은 몇몇 종교를 기반으로 한 공간들이 중심이었다. 이제는 한식, 중식, 양식, 디저트 등 영역을 불문하고 채식 식당이 다양하게 형성되었으며 부분적으로 채식 메뉴를 제공하는 곳들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서울 기준).
이제는 채식이 트렌드가 된 걸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식품기업인 풀무원에서는 최근 채식전용 간편식 라인으로 ‘지구식단’ 시리즈를 출시했다. 올해 초부터는 편의점 프랜차이즈 기업들에서 채식 김밥을 비롯한 즉석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다수의 K-뷰티 기업들에서 비건 제품 라인을 선보이거나 아예 비건 코스메틱을 표방하기 시작한 것도 눈에 띈다. 한편 ‘라이프 트렌드 2023’에서는 내년도 예상 소비 핵심 키워드를 ‘과시적 비소비’로 꼽고, 그중 하나로 고기를 소비하지 않는 비건 실천이 트렌드가 될 것이라 예상하기도 했다. 이제는 채식주의자가 별난 외골수로 취급받던 과거는 끝났고, 모두가 함께할 만한 트렌디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걸까? 이런 변화가 그저 가벼운 유행마냥 쉽게 식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세간의 편견들이 우려되어 덧붙이자면, 나는 모두가 고기를 끊어야 한다며 강요할 생각은 없다. 사실 소수의 사람이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보단 다수가 고기를 덜 먹게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아니고 (지금은 페스코 단계로 하고 있다) 채식을 시작한 뒤에도 사회생활을 위해 타협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의 나는 채식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데 관심이 많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채식을 선택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문제가 채식 확대에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식단에서 채식 비중을 늘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고 욕구 충족의 면에서도 만족스러운 선택일 수 있도록 하는 기술 발전, 상품 개발, 제도와 정책 같은 것들 말이다.
채식을 쉽게 하는 사소한 변화들
공장식 축산업으로 인한 결과는 기후위기 심화와 동물들의 고통, 그리고 끊임없는 전염병이다. 현재 규모의 공장식 축산업을 유지하는 일은 지속가능한 길도 윤리적인 선택도 아니므로 채식 비중을 확대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식물성 대체식품의 질과 접근성이 대폭 높아지고 세포배양육(실험실 생산 고기)과 같은 대체육도 상용화되어서 공장식 축산업이 종식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 기대하면서, 다만 그런 미래가 오기 전에도 소소한 몇 가지 변화는 지금 여기에서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식물성 식품인지 표식만이라도 잘 이루어진다면 채식인들이 감내하는 일상의 불편 중 큰 부분이 해결될 것이다. 작년에 영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방문했던 식당의 메뉴판에 ‘비건(VG, 동물성 성분 없음)’, ‘베지(V, 고기 없음)’ 표식이 메뉴별로 따로 붙어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식당뿐 아니라 마트에서 파는 모든 식품에도 그러한 표식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제대로 채식하려면 제품 박스를 눈앞에 대고 작은 글씨를 꼼꼼히 읽어야 하고, 식당에선 점원을 귀찮게 하면서 메뉴별 성분을 일일이 물어봐야 하는 현실인 것과 대조적이다. 게다가 일부 성분은 배경지식 없이는 그것이 동물성임을 알기 어려운데다(예를 들어 '젤라틴'이나 ‘키토산’ 같은 성분), 식당에선 분명히 사전에 물어보고 주문했는데도 고기가 포함된 음식이 나와버리는 불상사가 꽤 자주 일어나곤 한다(햄은 고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고기 안 들었어요’ 말씀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식품기업들과 음식점들에서는 ‘채식 상품/메뉴 1개 만들기 캠페인’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물론 제도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기업과 음식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이를 유도하는 정책으로 말이다. 식품기업들이 채식 상품을 단 하나씩이라도 생산한다면, 그리고 음식점마다 채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단 하나씩이라도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채식하기의 난도가 정말로 대폭 낮아질 것이다.
교육기관이나 공공기관에서는 채식 선택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대학에서는 캠퍼스 내 식당 중 한곳에서라도 채식 메뉴를 하나 이상 제공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급식에서 채식 옵션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등으로 말이다. 참고로,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우리 학교의 비건 학식 시범사업은 학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어 앞으로 확대해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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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진
청년정의당 전 대표. 청소년 시절부터 정치권에 관심을 두고 활동했다. 중학생 시절 두발복장규제와 체벌 등 학생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맞서 학교를 자퇴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진학한 후에도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운동 등 청소년 인권 관련 활동을 했다. 2019년 정의당의 청년 대변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