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모하던 지식인이었던 시대의 어른, 이어령 선생이 올해 초,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흔한 방사선 치료조차 마다하고 사실상 곡기를 끊고 오랜 시간을 버티셨다. 선생은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재택 의료를 결정한 이후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사지만 선생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순 없다. 생의 종착역에 외로이 서있는 환자에게 치료의 시간보다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더 가치 있다면 선택은 온전히 환자의 권리이니까.
선생을 고통스럽게 했던 췌장암은 참 고약스러운 암이다. 흔하지 않은 암으로 그간 알려져 왔으나, 최근 들어 다른 암과 마찬가지로 생활방식이 서구화되면서 췌장암 환자 또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발생 현황을 보면 인구 10만 명당 남성은 9.8명, 여성은 8명으로 서구 수준인 10명 이상에 근접해가고 있다. 다른 암과 마찬가지로 연령이 높을수록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
제목만으로 엽기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영화는 소설이 먼저 출간되었다. 2015년 일본 소설가인 스미노 요루의 작품이다. 영화 속 주인공, 야마우치 사쿠라'는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가 넌지시 던지는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의 의미는, 먼 옛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신이 아픈 부위를 동물의 부위로 먹으면 나을 수 있다는 의미이자 그 부위를 먹음으로써 영혼으로 그와 함께 하고 싶다는 고백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절절한 사랑 영화이다. 제목과 달리 반전이다.
의학에서 췌장은‘이자’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판크레아스(pancreas)라고 불린다. 그리스어에서‘전체(pan)’라는 뜻과‘기름덩어리(creas)’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췌장의 길이는 15cm 정도이고, 위 뒤편에 위치해 있다. 다른 장기들과 달리 단단하지 않고 물렁물렁하다. 의과대학 시절 해부를 하다가 잘못 건들면 손상되기 쉬워서 극히 조심해야 되는 장기였다.
시대의 지성을 고통 속에 떠나가게 한 췌장암은 알려진 대로 극히 예후가 좋지 않다. 췌장은 그 기능이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중요성이 밝혀진 것은 1800년대 후반인데, 이전까지만 해도 의학계에서는 존재감 없는 기름 덩어리로 치부했다. 해부학과 조직학, 생리학이 발달하면서 췌장은 소화액을 만드는 중요한 장기라는 것이 밝혀진다. 더불어 대표적 성인병인 당뇨와도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사실도 규명된다. 소화효소를 분비하며 혈당 조절을 하는 중요한 기관이 췌장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기를 관리하기란 쉽지 않지만 여타의 장기가 그러하듯 췌장도 적극적 관리가 필요한 인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췌장의 대표적 병은 잦은 음주로 인해 생기는 췌장염과 영화 속 사쿠라가 앓는 췌장암이 있다. 위 뒤편에 있기 때문에 상복부가 아프면 흔히 위염인 줄로 착각하기 쉽다. 췌장암은 위가 아픈 것처럼 느껴져서 단순히 위염약만 복용하다 보면 암이 더 진행하게 되어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지체되기 일쑤다. 조기 발견이 어렵고 발생된 이후에는 이미 진행이 된 상태가 많아 췌장암이 악명을 떨치는 이유이다.
영화에서처럼 병을 고치거나 어떤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동물의 장기를 취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에 퍼져있던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민간요법의 이름으로 비과학적인 처방들이 난무한다. 자칫 동물의 장기 안에 있는 기생충에 감염될 위험이 더 크다. 득보다 실이 큰 방법으로 환자의 병은 악화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췌장암을 앓고 있는 주인공은 “내가 죽으면 내 췌장을 먹게 해 줄게. 누가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살 수 있대”라는 대사를 하며 애절한 마음을 전한다. 이어령 선생은“암 걸리고 나니 오늘 하루가 전부 꽃 예쁜 줄 알겠다”는 절절한 말을 남겼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영화 속 사쿠라처럼, 이어령 선생처럼, 생의 막바지에는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풍경은 수척한 풍모의 슬픔으로 다가설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의 건강은 예의이다. 새해, 건강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