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위치한 한국금거래소. 금목걸이를 팔기 위해 방문한 손님 응대하랴, 전화 받으랴 서민철 한국금거래소 이사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서 이사는 “주말이 지난 뒤부터 안전 자산용으로 골드바를 찾는 수요가 늘었다. 가게를 직접 찾는 분뿐만 아니라 전화 문의도 늘었다”면서 “아무래도 미국 은행 도산으로 불안감이 높아진 영향 아니겠나”라고 설명했다.
주로 여유가 좀 있는 50~60대 연령층 고객이 투자나 상속을 위해서 골드바를 찾는다고 다른 관계자도 귀띔했다. 돌반지를 포함해 집에 있는 금붙이를 가지고 나와 파는 이들도 늘었다. 금을 사는 사람보다는 파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설명이다.
종로 귀금속 거리에 있는 다른 금거래소 관계자 역시 “체감상 손님이 20% 정도 늘었다”고 말했다. 이날 금은방 가게 몇 군데를 돌았다는 60대 여성 2명은 “금값이 앞으로 더 오를 것 같아 좀 사둘까 해서 나왔다”면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시장 불확실성↑…2014년 이래 역대 최고가 찍은 금값
경기 불확실성에 금값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 한국거래소(KRX)에 따르면 이날 금값은 종가 8만23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전일대비 1g당 940원(1.16%) 올랐다. 거래량은 5만5965g, 거래대금은 46억548만원이다.금값은 주말이 지난 20일, 종가 8만3490원으로 한국거래소에 금 시장이 생긴 2014년 이래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전 거래일 대비 한 번에 2930원(3.64%)이 껑충 뛰었다. 거래량은 14만2026g, 거래대금도 117억2261만원에 달했다. 이후 21일과 22일에는 종가가 소폭 줄었다가 다시 23일부터 반등을 시작, 8만2000원대로 올랐다.
국제 금 시세는 지난 20일 한때 온스 당 2000달러를 돌파해 2007.30달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온스 당 2009.59달러 이래 최고치다. 금과 관련한 상장지수펀드(ETF)도 고공 행진했다. 같은날 KODEX 골드선물 ETF는 장중 1만3040원까지 오르면서 연중 최고가를 경신했다.
금값이 급등한 원인은 무엇일까. SVB 파산과 세계적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 합병으로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에 불확실성이 커지자 자금이 안전 자산으로 몰리는 추세다. 금은 전통적 안전자산이다. 거시 경제 변동성이 커지거나 물가가 상승할 때 선호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1973년 스태그플레이션, 2001년 미국 경기 침체,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펜데믹 등 과거 경기 침체를 맞는 고비마다 금 가격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SVB, CS가 끝일까…금값 상승 당분간 이어질 듯
실리콘밸리를 비롯해 글로벌 벤처기업 자금줄 역할을 해온 SVB는 지난 10일 폐쇄 절차를 밟았다. SVB는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은행이다. 지난해 12월31일 기준 약 209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최대 규모 은행 파산 사건이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계속되는 기준금리 인상과 벤처기업으로부터 밀려드는 예금 인출으로 ‘뱅크런’ 사태가 벌어지며 결국 문을 닫았다. 미국 재무부가 예금을 보장해주겠다고 하면서 시장 불안감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이번에는 유럽발 악재가 터졌다. 유동성 위기로 휘청이던 CS는 19일 경쟁사인 스위스 투자은행 UBS에 매각됐다. 이 과정에서 스위스금융시장감독청은 CS가 발행한 약 22조65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AT1·코코본드)을 전액 상각, 즉 소멸시켰다. ‘주식보다 채권이 안전하다’는 통념을 깨트린 것으로 채권 시장 악화를 초래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퍼스트리퍼블릭뱅크(FRB), 팩웨스트 뱅코프 등 미국 중소형 은행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시장 불안은 여전하다.
당분간 금값 오름 현상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그룹 산하 시장조사기관인 피치 솔루션은 올해 금값 평균 전망치를 기존의 온스당 1850달러에서 1950달러로 상향 조정한 데 이어 “향후 몇 주 안에 금값이 2075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광영 신영증권 ESG & 글로벌 유동성 담당 연구원은 지난 21일 ‘금융기관 불안에 안전자산 금 날개 달다’ 리포트에서 “2월 들어 미국 고용지수 등이 양호하게 나오면서 국제 금 가격이 하락세를 보였지만 3월 SVB 사태 후 안전자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다시 상승세로 전환했다”며 “금융권 부실 등으로 예상보다 빠르게 연준의 긴축 통화정책 기조가 변화한다면 달러 강세 완화로 연결되면서 국제 금 가격에 긍정적인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