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에게 깨지기 일쑤인 내향형 현대인 배리 앨런(에즈라 밀러)에겐 비밀이 있다. 바로 초음속을 넘나드는 히어로 플래시라는 것. 빛보다 빠른 그는 건물이 붕괴하는 재난이 닥쳐도 사람들을 척척 구해낸다. 하지만 스스로를 “저스티스 리그의 잡일 담당”, “배트맨의 뒷처리 담당”으로 비유하며 자조한다. 그런 배리에게 새 전환점이 생긴다. 빛보다 빨리 달리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돼서다. 배리는 가족의 평화를 깬 과거 사건을 바로잡고 싶다. 브루스 웨인(벤 애플렉)의 만류에도 그는 시간을 거슬러 달라진 결과와 마주한다.
14일 개봉한 영화 ‘플래시’(감독 앤디 무시에티)는 초음속 히어로 플래시를 내세운 영화다. 다만 플래시 개인만 다루지는 않는다. DC코믹스를 대표하는 히어로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에 슈퍼걸 등 다양한 캐릭터를 포괄한다. 플래시의 서사와 멀티버스 세계관을 조합해 DC코믹스의 새 무대를 안정적으로 다져둔다.
배리는 절박하다. 행복했던 과거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다. 괴로운 마음에 도로를 마구 내달리다 시공간을 넘어선 배리는 과거로 가겠노라 결심한다. 상처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이라는 배트맨의 말에도 “토마토 캔 하나로 무너진 가족”을 재건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행동으로 뒤바뀐 시간선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자신이 대학생이던 세계에 불시착한 배리는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났다는 걸 깨닫는다. 크립튼 행성의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은 자신의 기억보다 이르게 지구를 침공한다. 그에게 도움을 줄 만한 이들은 없다. 슈퍼맨, 아쿠아맨, 원더우먼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선이 뒤틀리며 미래가 새로 생겨나서다. 든든한 동반자였던 브루스 웨인(마이클 키튼)은 나이가 들어 배트맨에서도 은퇴한 상태다. 설상가상 이 세계 속 18세 배리는 막무가내인 철부지다. 배리의 어깨가 무거워질 때쯤 극은 새로운 탈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짜임새가 좋다. 멀티버스 설정을 적절히 활용해 플래시의 이야기와 함께 DC코믹스 히어로들까지 자연스럽게 아우른다. 덕분에 DC코믹스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캐릭터들을 대략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산만하지 않다. 웃을 지점은 곳곳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플래시가 보여주는 느릿한 코미디는 색다른 재미를 준다. 경쾌한 분위기 속 감정을 건드는 장면이 균형 있게 어우러졌다. 과감한 컴퓨터 그래픽(CG) 연출도 돋보인다. 플래시의 속도감을 보여주는 그래픽 연출과 전자기타음은 초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준다. 두 명의 플래시가 벌이는 초음속 전투는 압권이다. 히어로 무비 정체성에 충실한 건 ‘플래시’의 강점이다. 뛰어난 완성도는 ‘어벤저스’ 시리즈의 전성기를 보는 듯하다.
배트맨은 ‘플래시’의 치트키다. 배트카를 타고 활보하는 배트맨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움이 몰려온다. 배트맨을 가장 많이 연기한 배우 벤 애플렉부터 지난 1992년 개봉한 ‘배트맨2’(감독 팀 버튼) 이후로 31년 만에 배트맨을 다시 연기한 마이클 키튼이 든든하게 극을 떠받친다. 극 말미 등장하는 또 다른 배트맨은 후속편을 향한 기대감을 키운다. 이외에도 2013년 ‘맨 오브 스틸’에서 조드 장군을 연기한 마이클 섀년이 또 한 번 조드 역을 맡아 향수를 더한다. 새로이 등장한 슈퍼걸(사샤 카예)도 눈여겨 볼 만하다.
‘플래시’가 넘어야 할 산은 히어로 프랜차이즈인 마블도 아닌 주인공 배리를 연기한 에즈라 밀러다. 다사다난한 개인사가 극 내내 몰입을 방해해서다. 에즈라 밀러는 최근 성희롱과 폭행, 절도 등으로 송사에 휘말렸다. 2년 동안 공식석상에 나서지 않던 그는 ‘플래시’로 복귀 시험대에 올랐다. ‘플래시’에서 에즈라 밀러는 1인 2역을 차지게 소화하며 마구 질주한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그가 일으킨 사건이 떠오를 때면 극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관객이 그를 수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흥행 향방도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영화 자체의 만듦새는 뛰어나다. DC코믹스가 새로 내세운 확장 유니버스(DCEU)의 앞날이 밝다. 쿠키 영상은 하나다. 큰 내용은 없으나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상영시간 144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