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무대는 거대한 나무 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4월, 일본 오키나와 섬에서 전투를 치르던 두 군인이 피신한 곳이다. 전쟁을 여러 번 겪은 본토 출신 상관은 겁에 질린 오키나와 출신 신병을 어르고 타이르며 숨을 죽인다. 둘은 날이 갈수록 세를 넓히는 적군 야영지를 보며 2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 앞에 도착한 편지.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은 2년 전에 끝났습니다. 어서 거기서 나오세요.” 지난 20일 개막한 연극 ‘나무 위의 군대’ 속 이야기다.
‘나무 위의 군대’는 일본 반전(反戰)문학의 거장 고(故) 이노우에 히사시가 태평양 전쟁 중 나무 위에서 2년을 보낸 두 군인의 실화에서 영감 받아 구상한 작품이다. 히사시가 생전 미완으로 남긴 작품을 극작가 호라이 류타와 연출가 쿠리야마 타미야가 이어받아 2013년 일본 도쿄에서 초연했다. 한국에는 2015년 처음 들어와 이번이 두 번째 공연이다. JTBC ‘나의 해방일지’와 영화 ‘범죄도시2’(감독 이상용)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손석구가 신병을 연기하고, 연극과 TV를 오가며 활동해온 배우 이도엽과 김용준이 상관을 나눠 맡았다. 해설자 여자 역할로는 배우 최희서가 무대에 오른다.
작품은 두 군인을 통해 전쟁이 남긴 비극을 돌아본다. 신병과 상관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믿음이다. 신병은 상관이 오키나와를 지켜주리라고 믿는다. 상관은 전쟁을 시작한 국가의 선택을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믿음엔 균열이 간다. 신병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야 이길 수 있다고 믿지만, 상관이 왜 그런 지시를 내리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상관은 살기 위해 도망쳤으면서도 “우리는 잠복 중”이라고 말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의심과 수치는 두 사람을 안에서부터 파괴한다. ‘나무 위의 군대’가 공연되는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만난 민새롬 연출은 “일상 구석구석에서 믿음에 관한 전투를 치르는 인간 보편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기만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연극 초반은 전쟁 시트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코믹하다. 가령 이런 장면. 상관은 신병이 주워온 적군의 식량을 한사코 거부한다. 적군 식량을 먹는 것은 반역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서다. 이런 굶주림은 수도 없이 경험했다는 상관의 말 뒤로 여자는 “처음이다”라고 덧붙인다. 객석에선 와르르 웃음이 터진다. 다만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잦은 웃음이 메시지를 가리는 듯한 인상도 든다. 배우들도 “관객들이 이렇게 많이 웃으실지는 몰랐다”며 “작품이 더 잘 다가갈 수 있도록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2014년 ‘사랑이 불탄다’ 이후 9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손석구는 믿음을 의심하게 되는 신병의 감정 변화를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현실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평소 연기 철학대로,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객석 곳곳까지 신병의 불안과 번뇌를 전한다. 최희서는 토속적인 원작 속 여자 역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라 나무의 혼령, 혹은 전쟁으로 희생당한 모든 생명체의 상징”으로 캐릭터를 구축했다는 그는 “내가 이 이야기를 왜 전달해야 하는지 그 의지를 되새기며 공연하고 있다”고 했다. 공연을 닫는 내레이션이 특히 압권이다. 2시간 내내 감정 없던 최희서의 목소리가 슬픔과 분노로 미세하게 떨릴 때, 관객들은 전쟁의 비극성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다.
민 연출은 “오키나와의 역사와 태평양 전쟁 당시 공포된 전진훈(살아서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할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정신자세와 행동규범) 이념을 공부하고 작품을 본다면, 더욱 풍성하게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작품은 애초 오는 8월5일까지 관객을 만날 예정이었지만, 같은 달 12일까지 공연을 연장하기로 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