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는 모두를 사랑해 [쿡리뷰]

‘바비’는 모두를 사랑해 [쿡리뷰]

기사승인 2023-07-19 08:00:06
영화 ‘바비’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는 언제나 행복하다. 영원한 여자들의 파티 속에서 매일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바비는 뭐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대통령·대법관·변호사·비행기 조종사·의사·기자 등 바비랜드에 사는 바비들은 온갖 직업을 가졌다. 노벨상을 비롯해 모든 영광은 바비들의 몫이다. “어제도, 내일도, 날마다 최고”라고 즐거워하던 바비. 그는 신명나게 춤을 추다 갑자기 엉뚱한 말을 내뱉는다. “죽는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 속 바비는 뭔가가 잘못됐음을 감지한다. 꼿꼿하게 유지하던 까치발이 평평해진 순간 그는 결심한다. 이 이상함을 고치기로.

19일 개봉한 영화 ‘바비’(감독 그레타 거윅)는 바비인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구현했다. 어린 아이들의 인형놀이와 바비랜드 속 바비들의 생활상을 절묘하게 연결시키며 관객들의 추억을 슬그머니 건든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바비랜드에서, 바비인형들은 저마다 개성을 자랑한다. 대통령 바비, 인어 바비, 현재는 생산이 중단된 임산부 바비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들이 사는 곳은 아름답게 꾸며진 인형의 집, 바비하우스다. 온통 분홍빛인 공간에서 바비들은 맘껏 뛰논다. 디스코 리듬에 맞춰 춤판을 벌이고, 스포츠카·모터보트·로켓·자전거·캠핑카 등 다양한 이동수단을 통해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를 오간다. 어린 시절 해봤을 법한 상상을 그대로 담아낸 스크린 속 세계가 눈을 즐겁게 한다.

‘바비’가 인형의 집을 모티브로 구현한 바비랜드.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마고 로비가 연기한 ‘전형적인 바비’는 실제 마텔사가 최초로 출시한 바비인형을 모델로 한다. 그는 자신이 고장났다는 걸 인정하고 현실세계로 향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갖고 노는 여자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인형을 험히 다루는 주인을 만나 외형이 망가진 ‘이상한 바비’(케이트 맥키넌)는 조언한다. “그 아이의 슬픔이 바비의 인형다움을 저해하고 있으니, 네 문제를 해결하려면 걔부터 만나”라고. 그런 바비를 따라나선 건 켄(라이언 고슬링)이다. 켄은 바비의 짝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다. 바비랜드에서 그는 바비가 바라봐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뚜렷한 직업도 없다. 해변가에 머무르지만 자신을 안전요원도 아닌 ‘그냥 해변’이라고 소개한다.

현실세계로 향한 두 인형은 당황을 금치 못한다. 바비는 자신을 곁눈질하는 행인들에게서 폭력성이 섞인 저의를 읽어낸다. 불쾌해하던 바비는 “강력한 여성 에너지(Woman Power)를 얻기 위해 점심시간 공사장을 가겠다”고 하지만, 그곳엔 남성들만 즐비할 뿐이다. 반면 켄은 가부장제가 만연한 새로운 세상에 눈뜬다. 남성이란 이유로 인정과 존중을 손쉽게 받는다는 것에 놀라워한다. 대통령도, 지폐에 담긴 위인도 모두 남성인 걸 발견한 켄은 “이곳은 남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며 눈을 반짝인다. 같은 시간, 바비는 자신을 만든 마텔사의 CEO와 주요 임원이 모두 남성인 것을 보고 “현실 세계는 완전히 엉망”이라고 낙담한다. “난 남자고, 여기선 그거면 된다”며 의기양양해하는 켄과 달리, 실존하는 위기에 직면한 바비는 당당함을 잃고 우울해한다. 

‘바비’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는 동일한 상황에서 바비와 켄이 느끼는 각기 다른 감정을 비추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바비랜드를 극단적인 기울기를 가진 공간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현실세계로 무대를 옮겨 이 모든 걸 뒤집는다. 불편함과 익숙함을 번갈아 느꼈다면 감독의 의도가 적중한 셈이다. 거윅 감독은 어느 한쪽에 권력관계가 쏠린 상황에서 다른 한쪽이 느낄 박탈감을 관객이 자연스레 느끼게끔 한다. 동시에 성별 권력의 불균형이 현실에 얼마나 만연한지를 꼬집는다. 이를 모나지 않게, 때로는 웃음이 새어나오도록 경쾌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미디어가 앞장서 멋지게 묘사하던 수컷들의 대립을 ‘바비’답게 연출한 장면은 박수가 절로 난다. 무해한 남성들이 벌이는 조악한 싸움이 영화의 볼거리 중 하나다.

‘바비’는 메시지에 집중한 작품이다. 극 초반을 화려한 볼거리로 꾸미면서도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히 담는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패러디한 오프닝에서 내레이션을 통해 “적어도 바비들은 자기들 덕분에 페미니즘과 평등권이 해결된다고 믿는다”고 언급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극이 이어질수록 메시지는 비유와 직설을 오가며 나타나고, 후반부에서는 보다 더 강력하고 직관적으로 몸집을 키운다. 바비와 공명하는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의 일갈은 거윅 감독이 쏟아내는 절규처럼 들린다. 공감을 자아내는 대사에 전율이 일 정도다.

‘바비’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러나 ‘바비’는 모두를 사랑하고 아우른다. 영화는 집단 대립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비’가 강조하는 건 ‘나다움’이다. 누구든 애쓰지 않아도 존재할 이유와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냉혹한 현실에 우울해하던 바비는 물론, 바비가 봐줄 때만 멋진 날을 보낼 수 있던 켄 역시 자아를 회복하는 순간을 맞는다. 바비의 하이힐처럼 기울어있던 운동장이 단화처럼 평평해질 때, 두 자아는 비로소 동등해진다.

‘바비’는 어떤 누구도 외면하지 않고 포용적인 태도로 감싼다. 그러면서도 볼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를 빼곡하게 마련해둔다. 일순 먹먹하다가도 금세 웃음 짓게 하고,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비롯해 ‘레이디스 맨’(1961), ‘오즈의 마법사’(1939) 등 고전 할리우드 명작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고 로비와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를 보는 재미 역시 가득하다.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만나볼 수 있다. 쿠키는 없다. 12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14분.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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