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동 샤롯데시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신화와도 같은 작품이다. 영국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30년 넘게 공연된 유일한 뮤지컬로 전 세계 누적 관객만 1억6000만명이 넘는다. 한국 전체 인구보다 세 배나 많은 사람이 ‘오페라의 유령’을 본 셈이다. 한국어 공연은 올해 13년 만에 열렸다. 지난 3월 부산에서 막을 올려 지난달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 기간이 8개월여로 길지만, 티켓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운 작품이라 관객 수요가 높은 것 같다”는 게 공연 쪽 관계자의 설명이다.
배우들에게도 ‘오페라의 유령’은 하늘의 별 같은 뮤지컬이다. 작품의 명성이 워낙 높아서다. “‘오페라의 유령’에 캐스팅되는 건 대기업에 부장으로 스카우트되는 것과 비슷해요. 작품에 내 몸을 갈아 넣으면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어 야심을 자극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크거든요.” 지난 17일 서울 논현동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우 최재림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오페라의 유령’에서 미스터리한 비밀을 가진 유령을 맡아 지난 11일 첫 공연을 마쳤다. 15년 차 배우는 꿈의 배역을 따낸 단꿈에 오래 젖어있지 않았다. “의도한 대로 연기해 벅찼지만, 일부 장면에선 기합이 과하게 들어갔다”고 자기 공연을 평가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프랑스 파리 오페라하우스 지하에 숨어 사는 유령이 코러스단원 크리스틴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최재림은 KBS2 ‘남자의 자격’으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던 2010년 이 작품 오디션을 봤다. 라울 커버(대역 배우)로 캐스팅됐지만, 출연을 고사했다. “내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더 찾아보자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후 13년. 30대 후반에 접어든 배우는 세월과 함께 여물었다. 패기가 강했던 20대 때와 달리, 지금은 “각 장면의 의미와 음악의 쓰임새 등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무게를 뒀다.
최재림은 조승우 등 함께 유령 역에 캐스팅된 배우들보다 4개월가량 늦게 공연에 투입됐다. 출연 배우들 컨디션을 고려한 공연기획사의 결정이었다. 최재림은 “동료들이 만든 속도에 나를 맞추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이런 최재림에게 제작진은 “너의 선택을 믿는다”고 응원했다. 유령이 무대에 등장하는 시간은 30분 남짓. 분장에만 1시간 넘게 걸리는 점에선 ‘가성비’가 낮지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본인이다. 최재림은 “유령은 한없이 군림할 수도, 한없이 짓밟힐 수도 있는 인물”이라며 “관객도 그 점을 은연중에 느끼기에 유령을 연민하는 것”이라고 봤다.
지난해 출연한 뮤지컬만 다섯 편. 드라마도 JTBC ‘그린마더스클럽’과 ENA ‘마당이 있는 집’을 연달아 찍었다. 팬들 사이에선 ‘소처럼 일한다’고 불리는 최재림은 ‘오페라의 유령’을 마친 뒤, 또 다른 대작 뮤지컬 ‘레미제라블’ 무대에 오른다. 장발장 역할이다. 그는 ‘커리어 정점에 올랐다’는 칭찬에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한때 “자존심 세고 자격지심도 있어 날카로웠다”는 그는 요즘 달라졌다. “언젠가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전체를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정점’이란 표현에 계속 들어맞도록 제가 노력해야죠. 데뷔 때부터 뮤지컬은 제게 일상적인 존재였어요. 저는 무대 위에서 먹고 자고 살고 관계 맺었으니까요. 달라진 건 책임감이에요. 동료·후배들이 존경하고 존중할 만한 선배가 돼야 한다는 책임감이요. 그동안 고음을 많이 내는 센 역할을 자주 맡았어요. 이젠 부드럽고 점잖은 캐릭터도 연기할 준비가 됐습니다. 드라마와 영화 등 매체에서도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되고 싶지 않아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