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날아온 ‘해바라기 가수’는 흡사 용광로 같았다. 화염 속에서 노래하는 뜨거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광로는 각종 광석을 녹여 쇠붙이를 만든다. 그 역시 록, 힙합, 팝, 컨트리 등 온갖 장르를 녹여 또 다른 장르를 만들었다. 그 음악의 이름은 포스트 말론. 23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싱어송라이터 포스트 말론 콘서트는 그의 이름값을 확인하기 제격인 자리였다.
공연을 연 것은 뜻밖에도 장엄한 현악 연주였다. 4인조 오케스트라의 비애감 젖은 연주가 격정으로 치닫자 지글거리는 전자기타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말론은 한 손으로 맥주를 높이 쳐든 채 무대로 들어섰다. 꿀꺽. 술을 한 모금 들이킨 그는 연료를 채운 열차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첫 곡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에 52주간 진입한 히트곡 ‘베러 나우’(Better Now). 관객들은 시작부터 ‘떼창’으로 말론에게 화답했다.
팔다리로도 모자라 얼굴에까지 문신을 새긴 힙합 스타는 의외로 귀여웠다. 데뷔 후 처음 한국을 찾아 3만여 관객 앞에 선 말론은 연신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뭔가를 말하려 할 땐 꼭 “신사숙녀 여러분”으로 입을 열었고, 노래를 끝낼 때마다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흥에 겨울 땐 그룹 블랙핑크의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쥐어뜯었다. 말론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지난해 한국계 여성과 약혼했고 슬하에 딸을 뒀다. 공연장에선 그를 ‘포서방’(포스트 말론 서방)으로 부르는 팬도 있었다.
말론은 이날 ‘록스타’(rockstar), ‘아이 라이크 유’(I Like You) 등 히트곡과 ‘오버드라이브’(Overdrive), ‘케미컬’(Chemical) 등 신곡을 골고루 들려줬다. 관객들은 말론의 애칭인 ‘포스티’와 본명 ‘오스틴’을 번갈아 연호하며 열광했다. 깜짝 협업도 벌어졌다. 말론이 객석에서 관객 한 명을 발견하고 무대 위로 올리면서다. 그는 “관객의 이름은 은지”라며 “은지가 나와 연주하고 싶어서 기타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은지씨가 기타줄을 퉁기자 말론은 ‘스테이’(Stay)를 부르기 시작했다. 머리엔 은지씨가 선물한 갓을 쓴 채였다.
말론은 온몸을 불사르듯 노래했다. 무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면서 랩을 했고, 남은 한 방울의 에너지마저 쥐어 짜낼 기세로 웅크려 고음을 내질렀다. 자신이 내뿜는 열기에 몸이 달았는지 중반부부턴 아예 윗옷을 벗고 공연했다. 그가 앙코르 곡으로 ‘선플라워’(Sunflower)를 선곡하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우리말로 해바라기를 뜻하는 이 곡은 2018년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감독 밥 퍼시케티·피터 램지·로드니 로스맨)에 삽입돼 세계적으로 히트했다. 무대에선 말론 측이 준비해온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생명 탄생이 사랑의 비밀을 깨닫게 한 걸까. 말론은 아빠가 된 후 삶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발매한 신보 ‘오스틴’의 첫 곡 ‘돈트 언더스탠드’(Don’t Understand)에서 ‘네가 왜 날 그렇게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노래했던 말론은 이날 관객들에게 “자신이 돼라. 사랑을 퍼뜨려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여기 많은 분이 계시죠. 그중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당신 자신이 되세요. 자신을 표현하세요. 여러분만큼 멋진 사람은 없거든요. 사랑을 퍼뜨리세요. 꿈을 향해 나아가세요. 그 누구도 여러분을 막을 수는 없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