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칼럼-이유원]
‘고양이를 구하라(Save the cat)’는 스토리 작가들이 시나리오 작법에 대해 공부하게 되면서 심심찮게 마주하게 되는 격언이다. 90년대 미국의 영화 시나리오 작가 블레이크 스나이더가 쓴 책 시리즈의 제목에서 유래하게 된 이 말은, 이름 그대로 몰입감 있는 스토리를 쓰고 싶어하는 작가들에게 우선 주인공으로 하여금 ‘고양이를 구하게’ 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대체 고양이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우리는 도입부에 드러나는 가지각색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평범할 수도 있고, 특별할 수도 있다. 익숙한 배경과 성격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독특하고 난해한 캐릭터일 수도 있다. 주인공을 어떻게 디자인하냐는 순전히 창작자의 자유겠으나, 블레이크 스나이더가 강조한 것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사람들이 이 주인공을 사랑할 만한 구석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기에 처한 고양이를 구출하거나,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선뜻 음식을 내주거나, 무거운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노인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돕는 등,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양심과 공감을 자극할 수 있는 선한 사건으로 그들의 마음의 장벽을 무장 해제하고 주인공에 대한 이입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이렇게 이야기 초반에 빠르게 고양이를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관객들과 주인공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지금부터 진행하게 될 이야기를 더 가깝고 실감나게 공감할 수 있도록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는 현대에도 이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새로운 재미와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다양한 캐릭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탄생하고 있는데, 그럴수록 관객의 이입을 직접적으로 유도해야 하는 중요도가 더 커졌기 때문이다.
‘크루엘라’에서는 주인공 크루엘라가 비록 표독스럽고 이기적인 악역임에도 사실은 관객 편임을 강조하기 위해 어린 시절 에피소드 안에서 쓰레기와 함께 버려진 아기 강아지를 구출한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주인공 성기훈이 관객들이 생각해도 답답할 정도로 순진하고 멍청해도 이것이 지나치게 반감을 일으키지 않게 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시장에서 산 생선을 길고양이에게 주는 장면이 의도적으로 추가되어 있다. ‘셜록’에서는 고기능 소시오패스 주인공 셜록 홈즈를 관객들의 마음 속에 안전히 안착시키기 위해 그의 냉철하고 딱딱한 말투 뒤에 가려진 인간적인 실수들을 주기적으로 배치한다.
현대 콘텐츠들의 트렌드에 맞추어 더 복잡하고 고도화된 설정과 플롯을 주인공에게 부여하려 하면 할수록, 고양이 구하기의 난이도와 중요도는 더더욱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게임 기획에서도 ‘고양이 구하기란 게 존재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적이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슷한 장르와 비슷한 테마의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유저들은 어떤 게임이 자신이 몰입할 만하고,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고, ‘현질’을 해도 괜찮은지 끊임없이 고민하기 마련이다. 게임 역시 유저의 기기에 설치된 후부터 타이머가 흐르며 그 시간 내에 빠르게 고양이를 구해야 할 숙명을 가진 셈이다. 혁신적으로 실제 게임 진입까지의 시간을 줄여버리기도 하고, 시작하자마자 아름다운 컷신을 제공하여 유저의 욕망과 기대심을 충족시켜주기도 한다. 성장형 RPG 게임에서는 레벨 99의 기사로 튜토리얼의 플레이를 진행시킨 뒤 강제로 패배시켜 레벨 1로 전생시켜 이 게임의 목적과 즐거움을 먼저 알려준다. 여성향 스토리 게임의 경우 결제가 불필요한 프롤로그 단계에서 최대한 빠르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총출동시켜 유저의 취향에 그물망을 펼친다. 소셜 임팩트 게임의 경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 제시로 주목을 구하기도 한다. 유저의 공감, 당위,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고양이들을 구하며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 시장이 포화될수록 D1 리텐션(설치 후 하루가 지난 뒤 재접속하는 비율)과 D0 결제 비율(설치 후 첫날에 발생하는 인앱 결제 비율) 지표의 중요도는 더더욱 커지고 있다. 경쟁자가 너무 많고, 광고 등 마케팅 비용은 점점 비싸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속 모든 콘텐츠 창작자들이 해온 고민처럼, 게임 기획자들에게도 역시 이 게임이 고양이를 잘 구하고 있는 착한 게임이란 걸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유저에게 어필해야 하는 숙제가 생긴 셈이다.
이유원
1995년생. 초등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새 3년차 게임회사 대표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를 졸업하고, '아류로 성공하느니 오리지널로 망하자'는 회사의 모토를 받들어 올해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 '서울 2033' 등 기존에 없던 소재와 규칙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NDC, G-STAR, 한국콘텐츠진흥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지역 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인디게임 기획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대해 강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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