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란 칭호도 아깝고 그 땅도 아까워 다 파헤치고 싶다” “조선 최악의 임금” “잘난 아들한테 왜 질투하냐. 조상신한테 절해야지”
사극 드라마 후기가 아니다. 조선 16대 왕인 인조와 부인 인열왕후가 묻힌 파주장릉에 남긴 지도 애플리케이션 후기다. 지난달 18일 종영한 MBC 드라마 ‘연인’에 인조(김종태)가 주인공인 이장현(남궁민)을 오해해 핍박하는 내용이 등장하자, 분노한 시청자들이 시청자 게시판이 아닌 지도 앱에서 인조가 묻힌 왕릉을 찾아가 자신의 감상을 후기로 남긴 것이다.
온라인 후기가 일상 깊숙이 스며들며 후기를 통해 각자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놀이 문화처럼 되고 있다. 일종의 온라인 커뮤니티처럼 후기를 적는 공간에 자신의 소감을 나누고 ‘좋아요’를 누르는 식이다.
이젠 후기에서 논쟁도…“하나의 공동체”
온라인 커뮤니티처럼 후기 남기는 공간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 3월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 등장한 충남 금산군 기독교복음선교회 장소 후기엔 “넷플릭스 잘 봤다. 파렴치한 범죄자들”, “은팔찌 차고 감방 가자”는 비판 후기와 “언론에 나온 영상들은 사실이 아니라 가짜 재연이고 모두 조작인 게 드러났다”, “지켜주세요”라는 옹호 후기가 뒤섞여 올라오고 있다.
후기가 주는 재미를 담은 콘텐츠도 만들어지고 있다. 유튜브에 ‘후기 모음’을 검색하면 ‘웃긴 인터넷 쇼핑 후기 모음’, ‘미용실 후기 모음’, ‘회사 블라인드 후기 모음’ 등의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음식 배달 플랫폼에 남겨진 리뷰를 모은 영상은 조회수 500만를 넘겼다. 직장인인 최모(28)씨는 “심심할 때 후기 모음집 영상을 본다”라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신기하고 웃기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후기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 같은 기능을 한다고 진단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공동체는 학연, 지연 이런 정형화된 기관을 통해 형성됐다”면서 “최근엔 취향이나 관심사, 사회적 트렌드 따라 다양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후기 역시 공동체 공간으로서 다양한 모습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누군가에게 후기는 권력…“존중하는 문화 필요”
자영업을 하는 장모(49)씨는 후기로 힘든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정성껏 적어준 후기를 보다 보면 감사하고 동기부여가 된다”라며 “하지만 실제 겪은 것과 달리, 악의를 섞어 적은 후기를 볼 때는 정말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는 김모(29)씨도 “포토샵을 하지 않은 사진을 보고 사진을 잘못 찍었다는 등 후기가 올라온 적 있다”라며 “작업물이나 서비스에 대해 비판이 아닌 비난하는 평가를 볼 때면 슬프다”고 털어놨다.
후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후기를 무기로 무리한 요청을 하는 사례도 나온다. 지난 3일 한 음식점 주인이 손님에게 “리뷰 써줄게요. 1인분에 하나씩 서비스 주시구요”라는 요청을 당한 경험을 온라인에 올려 화제를 모았다. 그는 고민 끝에 글을 삭제하며 “리뷰를 정말 없앴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해당 글엔 “손님들에게 칼을 쥐어주니 진상들이 휘두르고 다닌다”는 등 공감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후기를 사적 제재 수단으로 이용하는 모습도 등장했다. 일부 누리꾼들이 최근 교권침해 학부모로 지목된 한 시민이 운영하는 가게와 직장을 찾아내 “여기가 목숨을 자르는 그곳이냐”, “업보 돌려받길 바란다” 등 내용을 장소 후기에 올린 것이다. 지난해 10월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현장 인근 가게나 2021년 한강에서 사망한 대학생과 함께 있던 친구 아버지 병원에도 부정적인 후기와 별점 1점을 줘 평점을 낮추는 ‘별점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이처럼 후기 문화가 진화하고 있는 모습을 이전 댓글문화가 발전하던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면에서 그렇다. 임 교수는 “사건에 반응하는 객체로 있던 누리꾼들이 후기라는 더 긴 글을 통해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주체로 부상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의견이 한쪽으로만 쏠리는 침묵의 나선이론처럼 중립적인 의견이 사라지면, 양극단에 있는 소수 의견만 남거나 후기를 이용해 비방하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며 “중립적인 의견 표현도 활발해질 수 있도록, 편하게 토론하고 상대방과 후기 대상을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유채리 기자 cyu@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