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앞에서 무력해지는 건 누구보다도 진심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대상 앞에서 열성적인 팬, 이른바 ‘덕후’의 마음은 활짝 열린다. 이들은 지금 가진 애정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영원을 믿으며 주저 없이 ‘덕질’에 뛰어든다. 덕후에게 불연속적인 미래는 두렵지 않다.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기 위해 지갑을 활짝 열고 모든 마음을 쏟아붓는다.
올해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이 같은 덕후의 존재감이 도드라졌다. 애니메이션 등 비주류로 여겨지던 서브컬처(하위문화) 팬덤은 침체기를 겪던 극장가에 숨통을 트이게 했다. 지난 1월4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대표적이다.
CGV가 추산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N차 관람 비중은 20.5%(이하 14일 기준)에 달한다. 올해 또 다른 히트작인 ‘엘리멘탈’(감독 피터 손)이 6.8%,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이 7%인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이다. ‘너의 이름은’·‘날씨의 아이’ 등으로 굳건한 팬덤을 보유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N차 관객 비중이 10.9%일 정도로 인기였다. 유명 가수 임영웅의 콘서트 실황을 담은 영화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의 N차 관객 비중(10.5%·3월 기준)과 비슷한 수치다. 서지명 CGV 홍보팀장은 쿠키뉴스에 “팬덤 중심으로 이른바 덕질 문화가 확산하고 영화를 소장, 몰입하는 소비문화가 마련됐다”고 짚었다.
서브컬처 팬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오프라인 행사 역시 활발히 열리고 있다. 그 동안 이 같은 행사가 K팝 팬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이제는 서브컬처 팬덤 역시 같은 문화를 향유한다. K팝·애니메이션·게임·스포츠 등 각 분야 사이 덕후의 이동 및 교류가 활발해지며 전 영역으로 확산돼서다.
오프라인 행사는 온라인 소통과는 다른 범주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덕톡회와 생일카페 등이 대표적이다. 덕톡회는 ‘최애’ 및 덕질 관련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는 자리다. 생일카페는 최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카페 등 공간을 빌리는 행사다. 사진 전시부터 굿즈 증정, 프레임 사진 촬영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마련돼 있다. 지난 7월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주인공 송태섭의 생일을 맞아 지하철역 전광판 광고와 생일 카페, 전시회, 응원상영회 등 각종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인기 웹툰 ‘가비지 타임’ 역시 주요 등장인물의 생일 카페 및 행사가 활발하다.
이 같은 행사는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대체로 높다. 교류를 통해 ‘덕심’을 키울 수 있어서다. 최근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주제로 덕톡회에 참여한 직장인 김영서씨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히 애정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송태섭의 팬이 된 이모씨는 지난 7월 팬덤 내에서 자체 기획한 송태섭 생일 전시회를 관람했다. 이씨는 “그림 전시를 둘러보며 최애를 향한 마음이 더욱 진해졌다”면서 “같은 마음을 가진 팬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좋았다”고 돌아봤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비대면이 일상이던 팬데믹을 거치며 소통을 향한 열망이 커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큰 규모의 행사가 아니어도 이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자리는 팬덤을 가리지 않고 더욱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